갈등의 축을 접어, <원칙>

2025.5.23~2025.6.1, 서울연극창작센터

by 임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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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규칙이나 법칙을 통해 정상 밖의 것들을 통제하며 하나의 질서를 만든다. 공연은 교장의 부임으로 시작해 새로운 질서 아래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학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교의 상황을 반영하듯 무대는 대칭을 띠고 있다. 각자의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을 기준으로 싸우는 인물들은 무대 양 끝에 놓인 계단만큼이나 서로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다. 무대는 관객에게 하나의 상징으로서, 본래의 목적을 잊은 채 편을 갈라 싸우기에 바쁜 한국 사회의 모습까지도 투영한다. 대칭적인 무대 위에서 이분법의 논리로 대립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극 바깥의 현실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부임한 교장이 새롭게 정한 ‘운동장에서는 체육복만 입어야 한다’는 교칙은 학교를 두 갈래로 분열시킨다. 이 교칙은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교장 부임 이전까지 교감의 지도하에 자유로운 학풍을 유지해왔던 학생들은 이례 없이 딱딱한 교칙에 당황하며 반발한다. 교칙은 학생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의견을 옹호하는 교사 역시 교장에게 반발한다. 교감을 비롯해 국어 교사 성일, 학생회장 라엘까지도 모두 반대 의견을 이야기하지만, 원칙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장은 이들의 말을 모두 무시한다. 여태껏 유지해왔던 학풍을 무시하는듯한 교장의 처사는 교장과 나머지 학교 구성원을 갈라놓는 원인이 된다.

그 중 교감은 학교의 졸업생이자 가장 오래된 교직원으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학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스스로 오랫동안 지켜왔던 학풍을 유지하기 위해 교감은 교장에게 교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할 것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교장은 교감에게 전근을 권한다. 교감의 전근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 과정에서 나머지 구성원들의 반발심은 점차 커진다. 교장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학교를 바꾸기 위해 교감을 없애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는 학생은 물론, 교직원 사이에서도 강한 믿음을 얻고 퍼져 나간다. 결국 교칙과 교장에게 불만을 표출하던 학교 구성원들은 교감을 축으로 교장에 대항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집단의 주축이 된 교감의 의견은 어디에도 들어가 있지 않다.

교감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교장에게 반발하기 위해 이들은 강경책을 선택한다. 교직원 집단 사직 및 학생 수업 거부를 이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집단 사직과 수업 거부를 이행하는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교장의 원칙주의와 닮아 있다. 교감은 강경책을 택한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동료 교사들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하는 성일을 막아보려 하지만 성일의 태도는 꿋꿋하다. 라엘 역시 수업 거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신문부장 양준의 말을 묵살한다. 교감이 책임을 지고 싶어 전근을 택한 것 아니냐는 양준의 말에 도리어 라엘은 화를 내며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원칙을 밀어 붙이는 교장에게 반발하는 이들의 모습은 교장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의견을 밀어 붙이는 라엘과 성일의 모습은 어떠한 대의를 추구하는 듯한 비장함까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비장함에는 정작 당사자가 빠져 있다. 교감을 앞세워 교장에게 반발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교감과 제대로 대화한 사람은 없다. 교감이 교장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학생들을 이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성일과 라엘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당사자가 빠진 채 자신의 정의만 밀어붙이는 행위는 그저 수단화된 정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갈등의 주축이 된 교감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공연은 줄곧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교감의 입을 막고 목소리를 차단시킨다. 교장과 교감의 대화는 교감이 말을 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인물이 개입하거나 장면이 전환된다. 학부모 간담회에서조차 교감이 말하려 하는 순간 양준이 끼어들어 기회가 사라진다. 공연 속 인물들은 시종일관 가운데 교감을 놓고 싸우지만, 실질적으로 교감의 목소리는 그 싸움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반발하는 성일과 라엘에게 교장은 “교감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라고 여러 번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도 교장에게 대답하지 못한다. 결국 교감과 정말 대화를 한 사람은 그들이 그토록 악마화 한 교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일과 라엘의 행동은 당사자의 의견은 배제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응당 당연한 것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작 교장과 교감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자리는 없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점은 등장인물들 중 틀린 주장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각자에게는 합리적인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타당하다. 어느 상황에서나 들어맞는 절대적인 원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싸울 뿐, 사실 이들 개개인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교장과 성일, 라엘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옳음을 ‘틀림’으로 본다.

이와 같은 갈등의 양상은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갈라치기’의 정치를 보는 듯하다. 나와 다른 이를 무조건적 ‘틀림’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정의만을 강요하는 모습은 다른 이에게는 부정의를, 공동체에는 비평화를 가져온다. 둘로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양선은 되묻는다. 나의 옳음이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결말에서 교감은 전근이 아닌 사직을 선택한다. 스스로는 원하지 않았지만 갈등의 축이 되었던 교감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분법의 대칭축이 되던 인물이 없어지자 비로소 화합하게 된 인물들의 모습은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모두가 정의롭다고 느끼는 것은 이분법으로 나뉘어 옳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화합의 상태이다. 양쪽이 같은 모양을 띄고 대칭으로 나뉘어져있던 무대의 모습처럼, 이분법 속에 가려져있던 그들은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대칭으로 나누어졌던 무대가 하나로 포개어지면 합일이 되듯이, 우리는 모두 같은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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