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6~2025.6.2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연극 <은의 밤>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 가상의 전쟁 상황을 가져온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에서 재연될 때 가질 수 밖에 없는 역사성을 낯선 이름 등의 방식을 취해 의도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이를 통해 특정한 시기나 상황, 인물이 아닌 보편적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함을 명시하고 있다.
주요 등장 인물은 이다, 아니타, 코라 등으로 이들의 이름은 보통의 한국 이름 같지 않다. 오히려 ‘무엇이다’와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상반된 의미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두 인물은 마치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둘 모두 전쟁의 피해자로 장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다는 눈을 다쳐 앞을 보지 못하고, 아니타는 정신적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혼란한 전쟁 속에서 끈으로 몸을 연결하여 서로의 눈과 입이 되어주며 국경을 향해 나아간다.
서로의 이름을 부정하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이중적으로 느껴진다. 이와 같은 이중성은 다소 의도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중적인 요소는 극의 전반에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된다. 도준은 가족을 끔찍히 사랑하고 아끼는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이지만, 전쟁에서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다와 아니타를 지켜주는 탈영병 역시 마찬가지이다. 탈영병은 어떠한 보상도 없이 둘과 동행할 것을 약속하고, 국경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아니타를 강간하고 임신시킨 뒤, 마지막까지 일언반구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물들의 행동은 인간에게 온전한 선과 악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선해보였던 인물들이 동시에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짚어주는 것이다. 공연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와 같은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마을의 아기 엄마는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임신한 아니타를 몰아세우고 마을에서 내쫓으려 한다. 전쟁으로 죽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간신히 삶을 얻은 도준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된다. 이다는 아니타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챙기지만, 탈영병이 그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내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물들의 모습은 은빛 마을에 대한 동화로 표현된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할 수 있는 은빛 물체에 대한 이야기는 중간에 삽입되어 이들의 이중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교훈으로 전환시킨다.
보편성은 배경이나 등장인물 등, 특정한 장치보다는 관객의 공감을 얼마나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의 선택이 관객들의 충분한 공감을 얻고 있는지 여부가 모호하게 느껴졌다. 일례로 이다의 캐릭터가 그러하다. 극은 주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텍스트 중심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다 역의 김신실 배우의 대사톤은 두드러지게 다가왔다. 다른 역할들과 달리 감정선을 제거한듯한 독특한 대사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다는 극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그가 겪는 상황은 극의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자신의 절친 아니타를 강간한 탈영병에게 이다가 느끼는 감정이 인간의 복잡한 면모나 선택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감정을 제거한 듯한 연기는 관객의 감정적 몰입을 저해하는 효과를 낳았다. 단조로운 대사톤을 유지하다가 감정적 폭발 장면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공감보다는 당혹스러움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이다가 말하는 이중성에 대한 논리도 그러하다. 이다는 탈영병을 붙잡는 과정에서 그가 아니타를 강간한 것을 자신이 음식을 훔친 것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인간은 모두 이중적이고 잘못을 저지르며 사는 존재이니 떠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중적이라고 완전한 선이나 악이 없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의 결정적인 증거로 강간과 음식 절도를 가져온 것은 다소 비약처럼 느껴졌다. 이는 두 잘못의 사회적인 경중이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다의 말은 인간 속의 선과 악을 모두 인정한다는 주제에서 벗어나 탈영병의 잘못을 없는 셈 치려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다만 이다의 말에서 드러나는 혼란은 전쟁을 겪는 모든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극 중 구현된 전쟁의 참혹함은 공연의 어떤 것보다 명료하다. 전쟁의 물리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공연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임하지만 또 다시 타인의 가족을 잃게 만드는 전쟁의 이중성 속에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다양한 인물들이 극 속에 존재한다. 그 안에서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공연은 적나라한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결국 <은의 밤>이 말하는 전쟁은 물리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매 순간 선택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인간의 내면까지 손을 뻗는다. 다양한 선택을 내린 수많은 인물을 통해 <은의 밤>은 극장을 나서 수많은 ‘전쟁터’를 마주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손에 든 은빛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