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늦게 찾아온 악명 높은 Day 1 모먼트
Day 1이 나름 스무스하게 지나가길래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왜 다들 이렇게 엄살을 부리나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오만함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일단 아침부터 영어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더니 말도 잘 안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랜만에 겪는 상황(9시부터 5시까지 백투백으로 이어지는 강의, 그룹 액티비티라는 이름 하에 짧은 시간 내에 내용을 파악하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내내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 같은 것들) 때문에 너무 진을 빼서 전반적으로 뇌가 잘 안 굴러가는 거였구나 싶었는데, 막상 텍스트가 눈에 안 들어오고,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내가 생각한 건 애들이 발 빠르게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하니까 도무지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더 얹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랬다.
하필이면 거의 기여하지 못한 그룹 액티비티가 끝나자마자 강사님이 이번 액티비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정답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 하나가 대화를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는 거다..!라고 해버린 것. 진짜 마음이 너무 찔렸다.. 선생님 다들 제 발언 차례 기다려주었어요… 말 못 한 건 제 잘못이에요….
잔뜩 풀이 죽어서 난 여기에서 뭘 하고 있나 싶다가 만난 남편은 잔뜩 신이 난 채 섹션 애들과 맥주를 마시러 간다고 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오빠네 섹션 애들끼리 만나는 거니까.. (사실은 따라가도 되는 거였다) 문득 이대로 집에 가면 오늘의 에피소드가 트라우마가 되어 날 따라다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로비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데 인도인 친구 S가 눈에 띄었다. 야후에서 일했다는 똑똑이 친구. 쟤 밥 먹으러 간다고 하면 따라가도 되냐고 해야겠다. (뻔뻔) Hey are you going home?이라고 물어봤더니 섹션의 다른 친구랑 버블티를 마시러 간다고 했다. 버블티 좋아하냐고 해서 일단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별로 안 좋아함)
버블티 가게로 가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녀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부러워! 젊음! 어떻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야심과 야망을 품고 여기까지 왔을까. 멋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쭉 걸어왔다. 신기하다. 한국, 특히 회사 안에선 저 정도의 나이인 사람을 만나면 보통 내가 무언가를 알려주는 상황이었는데, 여기에서 같은 학년으로 만나니 나 따위가 알려줄 게 있긴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멋있으면 다 언니지 뭐...
한 명은 바쁜 삶을 영위하느라 걸어간 버블티 장소에서 테이크아웃을 하고 나가버리고 S와 나는 정처 없이 1시간 반 가량을 걸었다. 섹션 애들이 7시 반에 맥주 먹을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한 단체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집에 가면 절대 이벤트에 가지 않을 걸 알았다. 너 집에 가면 다시 나올 거야? / 아닐걸. / 그렇지? 나도.
그러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 있는 펍 (=남편이 있는 펍)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좀 하다가 갑자기 입이 풀린 걸 알았다. 세상에.. 다 써버린 영어 뇌가 다시 돌아왔구나.. 이 새끼..
그리하여 거기에서 세상 쾌활한 사람인 척 인사도 나누고, S와 섹션 이벤트도 갔다가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왔다. 남편이 중간쯤까지 데리러 나왔다. 나는 이 방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했다. 오빠 나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여기에 와서 100% 마음에 드는 나, 이를테면 MBA 생활에 바로 적응해 버리는 나, 체력도 에너지도 가득인 나, 갑자기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하는 나.. 를 바로 만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기대도 안 했다. 나는 성장캐인 나를 잘 안다. 나는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사람이고, 작은 걸음으로 부단하게 우상향(!)으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게 업무 능력이든, 영어든, 사회성이든!
GMAT, 에세이, 인터뷰, 이사, 오리엔테이션, 수업, 네트워킹, 구직활동, 회사 생활 중 제일 만만한 건 오리엔테이션일 거다. 이미 합격했고, 사실 이거 세션 몇 개 빠진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출석 체크도 하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잘한다고 발표 점수를 더 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트라우마가 될 뻔한 에피소드를 가슴에 묻고 집에 와서 수치심에 괴로워하기보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 시간 반을 걷고,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섹션 이벤트 같은 것을 가서 모르는 이들과 맥주를 마시고 하는 작은 극복의 경험. 나는 아마 이 날을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