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조선시대 궁녀였을까
수년 전, 친척 아이 돌잔치로 서울에 갔다. 겸사겸사 수원으로 이사 간 친구도 만났다. 친구가 수원으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의미 있고,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정표로 182,000원 수표를 한 장 끊어서 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비 내리는 여름,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친구가 대뜸 “비도 오는데, 수원화성 걸을까?” 묻길래 나 역시 앞뒤 재지 않고 “좋아!” 답했다. 우리는 팔달문 근처 상점에서 우비를 샀다. 우비를 입었지만 신발이 젖어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와 함께 신발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우리는 빗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웃었다. 그렇게 수원화성은 친구와 비 오는 날 즐겁게 산책했던 사소한 행복으로 첫 대면 했다.
몇 년이 흘러 개인적인 고민을 핑계로 머리 식힐 겸, 친구 얼굴을 보러 수원에 다시 왔다. 친구 사무실은 팔달문 근처에 있었다. 퇴근 시간까지 친구를 기다리며 근처를 배회하다 화성장대에 올라갔다. 가을이었고, 혼자였다. 서장대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풍경이 쓸쓸한 내 마음에 와닿았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친구 전화를 받고 내려오면서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위로받은 듯 마음은 가벼워졌다.
지금은 경기도민이 되어 일 년에 서너 번 이상은 수원화성에 간다. 다른 지역에서 친구나 지인이 방문하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추천 명소가 됐다. 출발은 팔달문을 시작으로 서남각루, 서장대를 지나 화서문, 장안문, 동장대, 창룡문, 동남각루를 차례로 거쳐 지동시장으로 내려와 순대 곱창전골에 시원한 맥주로 마무리한다.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도는 이 길에서 가장 힘든 곳은 막 걷기 시작한 팔달문에서 서남각루까지다. 600m로, 10분 남짓이면 닿는 짧은 구간이지만, 계단 단차가 높고 가팔라 진땀이 난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큰 오르막 없이 멋진 풍광만 펼쳐진다.
화성 축성은 1794년(정조 18) 1월 7일, 팔달산에서 성곽 쌓을 돌을 뜨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1796년 9월에 화성 축성이 완성되었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재료는 돌, 나무, 철물, 숯 등으로, 그중 돌 뜨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애초 계획은 화성의 둘레를 3,600보(약 4.24km)로 만들려 했으나 1,000보가 늘어 4,600보(5.74km)가 됐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둘러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수원화성은 언제든, 누구랑 걸어도 항상 좋다. 그중 나는 동장대를 애정한다. 수원화성에 가면 그곳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다.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풍경 안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구경할 때 나른한 행복감을 느낀다. 또한 전란에도 굳건하게 견딘 하마석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를 위해 그리고 말에서 내릴 때 밟는 용도로 하마석을 설치했었다. 정조는 연무대에 왔을 때 부하의 등을 밟지 않고 하마석을 늘 이용했다. 나도 동장대에 가면 하마석에 자주 올라간다.
유난히 수원화성이나 고궁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함께 걷는 동행자에게 “나는 어쩌면 전생에 궁녀가 아니었을까?” 생뚱맞게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함께 걷던 사람들은 다양한 답변을 했다. 게 중에 한 선생님이 “왜 궁녀였을 거라고 생각해? 군졸일 수도 있잖아!”라고 답해 한바탕 웃었다.
수원화성은 돌로 단단하게 성벽을 쌓았다.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게 안쪽으로 흙을 쌓아 올렸다. 그런 성곽 안을 걸으면 왠지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더 자주 수원화성을 찾는 것 같다. 광교산과 크고 작은 풍광으로 이뤄진 수원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성곽 높이가 7.75m로, 특히 밖에서 성벽을 볼 때 그 웅장함이 두드러진다. 돌들이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세월을 견뎌왔음이 참 다행스럽다.
정조는 평소 무명옷을 입고 반찬 3가지 이상을 먹지 않는 군주였다. 수원화성을 축성할 당시 더위가 심할 때는 공역을 중지시켰다. 겨울에는 정 3품 이상의 관료들만 사용한다는 귀한 털모자와 솜옷을 기술자와 일꾼들에게 선물했다. 백성을 아끼고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화성 축성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일한 만큼의 품삯을 주었다. 시쳇말로 인적자원관리를 확실하게 한 것 같다. 또한 정조의 뜻에 따라 채제공은 성을 쌓을 때 중요한 3대 원칙으로 ‘서두르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원화성은 ‘크고 웅장한 성’ 이전에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 의미로,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조가 못다 이룬 ‘꿈꾸는 신도시’ 수원화성을 걸을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동장대 마루에 앉아 생각을 멈추고 하늘로 서서히 올라가는 헬륨 기구를 바라보면,
‘그래 반 박자 느긋하게 살자, 가능한 한 적게 갖자, 그리고 성벽처럼 단단하게 살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