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시시한 행복

온 우주가 응원하는 사람

by 서정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 있다.

좋은 글을 함께 나누고, 속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서로를 응원하며 때로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 헤아려 주는 사람. 정희는 그런 사람이 주변에 몇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 사람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어떤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 중에 혜영이는 손가락 안에 든다.


늦은 가을밤, 혜영이가 정희 집에 왔다.

저녁을 먹고, 수다도 실컷 떨고 잠자리에 누울 즈음, 혜영이가 불쑥 드라이브 가자고 했다.

정희는 놀라서 되물었다.

“이 밤에? 잘 시간이야?”

엉뚱한 혜영은 그녀답게 말했다.

“깊은 가을밤 은행나무길을 언니랑 걸으면 낭만 있잖아!”

둘은 40분을 달려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에 도착했다. 조용한 밤, 마치 우주가 노랗게 내려앉은 듯한 그런 밤이었다. 정희는 황홀경에 뒤통수를 얻어맞아 지진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니, 여기 은행나무길은 나에게는 아주 특별할 곳이야!”

혜영이가 조용히 말했다.

수년 전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홀로서기를 결심한 장소였다. 그 장소를 내게 선물처럼 보여주었다. 자존심이 세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춰주는 혜영이가 참고 또 참았을 생각에 정희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다.


혜영이는 중간중간 흔들림이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조용히 자기 자신과 손을 맞잡으며 누구의 도움이나 배경 없이 혼자 힘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분야의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정희가 혜영이를 처음 만난 건 십여 년 전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조그마한 얼굴, 여린 체구에 엇박자처럼 중저음의 사투리가 묻어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혜영이는 수업 시간에 질문이 많았다. 강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몸담은 산업현장에 대한 의견을 거침없이 말했다. 관점이나 접근방식이 독특하고 신선했다. 대체로 수업 시간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정희와는 정반대였다. 그래서였을까? 혜영이에게 자주 눈길이 갔다.


수업이 끝난 어느 토요일 오후, 둘은 느긋하게 정류장으로 걸었다.

수업 내용, 시험 준비 등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혜영이가 불쑥 “언니, 나 남편 때문에 힘들어.”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혜영이의 솔직함에 정희는 순간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나를 얼마나 신뢰하면 이런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걸까? 싶으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해 보였는데 속앓이를 많이 했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혜영이의 과거와 현재가 정희에게 왔다. 취미, 이직 준비, 관심 분야, 음식 취향까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며 둘은 친해졌다. 평소 친하지 않으면 말이 없는 정희와 달리 혜영이는 붙임성이 좋았다. 반짝반짝 아이디어가 많았고, 항상 뭔가를 도모했다. 또 표현력이 좋아 음식 조리 과정을 설명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정희는 웃으며 혜영이에게 말했다.

“너는 먹고 싶은 게 참 많겠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십여 년을 알고 지내며 둘은 꿍짝이 제법 잘 맞았다.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무보다 숲을 보는 면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감정적인 연결고리로 대화가 잘 통했다. 반면에 계획적이고 즉흥적인 면은 서로 존중했다.

언젠가 혜영이가 물었다.


“언니, 나 회사 옮길까?”

정희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이직할 수 있으면 해! 안되면 하던 일 계속하면 되잖아!”

혜영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정희가 대신 말해줘서 고마웠나 활짝 웃었다. 그 후 혜영이는 직급을 높여 이직에 성공했다. 기존 텃세에 적응하느라 후유증도 앓았지만, 지금까지 멋지게 해내고 있다. 혜영이가 이직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때 정희만 유일하게 이직에 찬성했다고 후일에 들었다.


혜영이는 정희를 자신의 멘토라며 가끔 앓는 소리를 했다.

“쉬엄쉬엄 가소, 언니 쫓아가기 힘드네!”

“하하하, 엄살은. 나는 네가 더 대단해.”


서로가 일에 열중하는 스타일이라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늘 아쉬워했다. 아직은 이른 봄,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주말 아침. 모처럼 일찍 만나 강화도로 향했다. 둘은 만나자마자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동안 못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때 혜영이 둘째한테 전화가 왔다. 어제 퇴근길에 넘어졌다며 숨 쉴 때마다 갈비뼈가 아프다고 했다. 혜영이는 근육이 놀라서 그럴 수 있다며, 병원에 가서 꼭 엑스레이 찍어보라고 딸애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엄마가 함께 가주지 못해 미안해”

이토록 다정한 혜영이라니. 어떤 날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팀원에게 전화가 왔다. 민원이 발생한 것 같았다. 혜영이는 팀원에게 먼저 묻는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이렇듯 혜영이는 늘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린다. 그 다정함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다. 작정하고 쏟아 내면 ‘독한 말 배우는 학원 다니냐!’ 핀잔 듣던 정희는 혜영이를 만날 때마다 문득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11월 한밤중 쌀쌀한 공기, 곡교천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물 냄새.

혜영이와 작정하고 출발했던 여행보다 조금은 귀찮게 출발했던 한밤중 은행나무길 산책이 지금도 정이 안에 깊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혜영이는 정희에게 “온 우주가 언니를 응원할 거야!” 자주 말했다.

이제는 정희가 혜영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혜영아! 온 우주가 너를 응원하고 있었어. 그 사실을 너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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