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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ug 31. 2024

제주올레 12코스, 물 위에 뜬 달

제주올레 12코스에서 으뜸은 ‘물 위에 뜬 달’ 수월봉이다. 수월봉 정자에서 쪽빛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로 보는 차귀도는 풍금 소리를 듣는 것처럼 아늑하다. 이름난 수월봉을 만나려면 고산 평야가 있는 중산간 마을을 한참 걸어야 영접할 수 있다.     

제주 서쪽 4월은 푸릇푸릇 청보리가 바람에 나풀댄다. 엄청난 힘으로 땅을 밀며 올라오기 시작한 마늘, 한창 수확 철인 양파는 누워서 마지막 일광욕을 즐겼다. 달큼한 양배추도 이사 갈 채비를 마쳤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꾼들 손이 바쁘다. 넓고 평평한 기름진 땅을 보며, ‘수월봉에서 분출한 화산재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방치되어 버려졌다고 생각될 화려한 브로콜리 꽃송이는 훗날을 도모했다. 인가가 드문 중산간 마을에서 식물들과 소곤소곤 안부를 물으며 걸었다. ‘봄날 제주 와서 농사일 도우며 한 달 살기 문제없겠네!’, 대책 없이 의욕이 급발진했다.     


서귀포시와 제주시의 경계선이 있는 12코스는 중간산올레가 절반이고 바당올레가 절반이다. 중산간 마을을 걷다가 ‘이제 바다 고프다’ 생각 들 때 탁 뜨인 푸른 바다를 만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간간이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자전거 라이더들도 만났다. 노을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소라 모형이 크게 보이는 ‘뿔소라 공원’에 도착했다. 몇몇 드라마 촬영지였다는 안내 푯말이 있다. ‘돌고래 스팟’ 덕분인지 사람이 많다. 돌탑에 앉아 바다 구경, 사람 구경하며 이제나저제자 돌고래가 나타나길 기다리다, 출몰하는 시간을 검색했다. 오후 3~5시로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돌 틈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캐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방풍나물을 캐고 있었다. "봄에만 화전으로 부쳐 먹을 수 있고 또 살짝 데쳐 어간장 넣고 들기름 둘러 무쳐 먹어도 맛나"다고 이야기했다.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해 도구리에 남아있는 생물을 마을 주민들이 물때에 맞춰 나와 바구니에 담았다. 바닷길이 잠시 끊기고, 다시 중산간 밭고랑으로 이어졌다. 가로수로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낭길을 지났다. 고산기후변화감시소가 딱 버티고 있는 고산평야 끝자락에 솟은 뷰 강패 수월봉에 도착했다.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누운 섬(와도) 그리고 죽도. 사소한 눈빛으로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작은 돛단배를 봤다. 점처럼, 먼지처럼 작고 느리게 지나갔다. 수월봉에서 해가 차귀도 장군바위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발그스레하게 서성인다. 제대로 정자에 자리 잡고 앉아 신발까지 벗었다. 발가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락거렸다. 시선은 차귀도를 향하는데 머릿속은 시끄럽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간극은 얼마쯤 될까?, 그들이 생각하는 나답다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 내가 아니었다. 진지하나 변덕스럽고, 계획적이나 즉흥적이고, 우유부단하나 강단 있는. 있는 그대로의 풍성한 존재로, 내 삶에 최고가 되고 싶다.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물었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끌어안고 포장로를 따라 바닷길로 내려왔다.  

‘엉알길’ 입구로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제주 사람들은 수월봉을 ‘노꼬물오름’이라고도 한다. 바닷가의 절벽 틈에서 ‘노꼬물’이라는 샘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전설은 먼 옛날 수월이와 녹고라는 남매가 몸져누운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캐러 수월봉에 올랐다가, 여동생 수월이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동생을 잃은 슬픔에 녹고는 17일 동안 울었는데, 이 녹고의 눈물이 바로 ‘녹고물’이라 한다.   

   

수월봉 아래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절벽은 아슬아슬했다. 절벽 곳곳에 화산탄들이 박혀 화석층이 더 뚜렷했다. 18,000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화산분출물이 겹겹이 쌓여 무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기암괴석의 절경은 공룡이 살던 시대 같았다. ‘낙석’ 위험으로 통제되는 구간이 더러 있었다. 여러 개의 갱도 진지 안에 바다 생물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엉알길 따라 걸으며 초밀접 거리에서 팬 미팅하는 기분으로 거대한 화석절벽을 볼 수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아주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 길로 다니지 않아 모든 절벽이 다 ‘엉알(큰 바위)’처럼 생긴 줄 알았겠지. 한가로운 포구 길가 빨랫줄에는 옷보다 오징어와 한치가 더 많이 널려 있다. 바닷바람에 꼬들꼬들한 오징어와 한치는 맑은 햇빛에서 잘 마른 수건처럼 구수한 향기가 났다. 붉게 노을 진 햇빛이 바다에 비춰 반짝이는 잔물결은 완전 내 취향 저격이었다.

그윽한 붉은 노을을 보며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이 스쳐 갔다. 길 위에서 생각과 느낌은 한없이 자유롭고, 휘발성이 강해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어느덧 생각 끝자락에서, 나는 지독한 습관처럼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울 때 즐겁고 신났다. 그리고 세운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 쾌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계획보다, 나만의 계획을 실행하면서 부딪치는 장해, 실수, 성마름을 하나씩 극복하고 수정하면서 목표에 도달했을 때 ‘나도 좀 괜찮은 사람이네!’ 어깨가 으슥하며 셀프 칭찬을 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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