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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Sep 11. 2024

제주올레 9코스, 쾌활한 젊은 오름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박수기정을 코앞에서 영접하니 연말에 특별보너스 받은 기분이었다. 좁은 숲길로 걸음을 옮겨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기분 좋게 차가운 청량감이 느껴졌다. 살짝 ‘숨차다’ 싶게 올라갔는데, 갑자기 탁 트인 넓은 밭과 비닐하우스 농막이 있었다. ‘어떻게 이곳으로 농자재를 운반했을까?’ 의문이 들지만, 절벽은 평지와 연결된 또 다른 길이란 걸 잊고 있었다.      

경사진 숲길을 걸으면 산그늘 속에서도 이마에 땀이 났다. 한적한 마을에 사람은 없고, 뜨문뜨문 호랑나비가 활짝 날개를 펴고 반겼다. 버스정류장에는 중년 부부가 앉아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서 있는 내게 “올레길 걸으세요?” 먼저 묻었다. 낯선 사람의 질문에 짧게 “네”라고 답했다. 사람이 반가웠는지 아저씨가 “우리는 힘들어서 그만 돌아가려고요. 집사람이 힘들어하네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 안색이 창백했다. 비니모자를 쓴 아주머니는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잘 산다는 게 뭘까?’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숲 속을 걸으며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한 번뿐 인 내 인생!, 이 휴가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할 일이 쌓였을지라도!, 일단 지금은 충분히 즐기겠어!, 나를 위해서!’라고 혼잣말을 했다.      


꽃기운이 뻗쳐 봄바람 따라 신나게 걸었더니 금세 군산오름 정상부에 도착했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군산오름은 제주 올레 9코스에서 단연코 으뜸이었다. 천여 년 전 분화했지만, 분화구 없는 ‘산’이란 이름을 가진 젊은 오름. 동서로 길게 가로누운 형태로 양쪽으로 펼쳐진 두 개의 봉우리가 군대 막사처럼 보여 ‘군산’이라고 한다. ‘나중에 갑자기 생겨난 산, 덧 생긴 산’이라는 의미도 있고, ‘군메오름’으로도 불릴 만큼 별칭이 많다.     

올레 여느 중간 간세와 다르게 군산 정상부에 설치된 간세는 특별했다. 하나의 멋진 예술품으로 서너 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었다. 날씨는 끄물끄물 하지만 제주도 전체가 한눈에 삥그르르, 내 안에 들어왔다. 대체 불가한 아우라를 가진 한라산과 미친 피지컬의 산방산이 보였다. 사이좋은 형제섬과 마주 앉은 송악산, 편히 누워있는 가파도, 금방이라도 돌고래를 반길 것 같은 마라도, 높고 낮은 오름과 수줍은 섬들이 바다와 다정하게 손잡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육지에 두고 온 생업을 잊게 만드는 풍경을 보며 ‘일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잠시 생각했다. 나는 일할 때 마음을 다했다. 일은 내게 즐거운 피로감과 월급 그리고 나를 설명할 수 있게 했다.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쓸데없는 자잘한 걱정과 불안은 익숙한 일에 몰두할 때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일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낙에 살았다. 나는 ‘일 중독자인가?’ 생각하며 몇 걸음 옮겨 군산 정상부에 도착했다.      

정상부에는 뿔 모양의 바위가 나란히 두 개 있었다. 독특했다. 군산 봉우리에는 ‘쌍선망월형’이라 하는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낸 곳이었다.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과 흉년이 든다고 하여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한 데서 ‘금장지’ 였다고 하는데, 무덤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 봉우리는 네다섯 명이 올라서면 꽉 찰 정도였다. 마침 사람이 없어 혼자 독차지했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모든 풍경에 “와! 와! 대박!” 감탄사와 함께 가슴이 찌릿찌릿, 심장이 튕겨 나올것 같았다. 사진을 정신없이 찍다가 순간 고소공포증이 밀려왔다. 어지럽고 무섬증으로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조심조심 힘 빠진 다리를 챙겨 정상부에서 내려오니 점심 먹을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있었다. 요리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선택한 덕분에 아침에 김밥을 준비했다. 제주 달걀을 얇게 여섯 장 부쳐 곱게 채 썰고, 제주 당근 2개도 깨끗이 씻고 채 썰어 맛소금 한 꼬집 넣고 살짝 볶았다. 육지 스팸은 적당하게 썰어 노릿하게 굽고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김에 밥을 깔고 채 썰어 둔 달걀 지단과 당근, 햄을 넣고 야무지게 말았다. 아침 식사로 그리고 점심 도시락으로도 쌌다. 군산 정상에서 제주 풍경을 발아래 펼쳐두고 도시락을 펼치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음! 맛있다. 맛있어! 꿀맛이네! 싸 오길 너무 잘했다!” 극성맞음이 입을 즐겁게 했다.

군산오름에서 내려가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파 놓은 여럿 진지동굴을 보며 기분이 씁쓸해졌다. 정상부 턱밑까지 차로 올라올 수 있는 주차공간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공동묘지를 지나 가파른 길을 한참 내려와 안덕계곡에 도착했다. 상록수림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 암벽 사이로 물이 흘렀다. 예전에는 안덕계곡에서 목욕도 했다지만, 지금은 수질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에 자리 잡은 귤나무는 자리를 탓하지 않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태풍이 할퀴고 지나갈 때도, 있는 힘을 다해 견뎠을 귤나무를 보면서 ‘귤나무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생각했다. 나는 100m 달리기 선수처럼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자주 번-아웃이 왔다. 해야 하는 일만으로 인생을 채울 수는 없다는 걸 이제 알았다. 털어놓고 싶은 감정은 털어내야 했다. 소모적인 감정이라고 치울 게 아니었다. 올레길을 걸으며 바쁘다고 밀쳐 둔 나 속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쾌활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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