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여행하는 느낌으로 성북동 길상사에 다녀왔다. 길상사에서 한양도성 성곽길까지 불쑥 다가온 가을의 풍요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삶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나는 누구며, 왜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가? 고민하며 한때 시니컬했다. 때마침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으며 인생에 멘토를 만난듯했다. 책 한 권이 주는 위로와 응원으로 가끔은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많이 아파하지 않았다. 나는 귀가 얇은 편이다. 그런데 어디에 깊이 빠지거나 쉽게 중독되지 않는 성격이라 종교는 없다. 주변에 교회, 성당, 절에 다니는 지인들이 “너처럼 산다면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되지”라고 말해줘 ‘다행히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고 사나 싶어’ 안심이 됐다.
1994년 어느 봄날이었다. 내 마음속 욕심을 줄이고, 화내지 말고 웃으며 살자는 속뜻도 좋았지만, 법정 스님이 ‘나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나누며 더불어 잘살기 위해서 시민운동이 필요하다’는 강연이 인상 깊어 ‘맑고 향기롭게’ 회원으로 가입했다. 무료 급식, 독거노인 반찬 나눔에 동참했는데, 내 시간 될 때 들쭉날쭉 참여하니 함께 하는 분들께 미안해졌다. 언제부턴가 일한다는 핑계로 몇몇 기관에 봉사를 후원금으로 대신한 게 벌써 30년 세월이 쌓였다.
그 인연으로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자주 간다. 한성대입구역에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성북 02’ 마을버스를 타면 쉽고 편하게 도착하지만, 도로가 널찍해서 북악산을 보며 걷는 게 훨씬 좋다.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싶은 기대 이상의 멋진 풍경이다. 성북동 도로를 벗어나 골목길에 접어들면 야트막한 경사가 많다. 길상사 올라가는 길 역시 오르막길이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한여름이 아니어도 땀이 난다.
길상사는 일반 사찰과 다르게 건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많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시주해서 만들어진 사찰, 기생 진향(김영한)과 함흥여고 교사 백석(백기행)의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ㄷ’ 자 모양의 기와집 같은 극락전,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자리에 봉안된 범종각 천장에 ‘이 종소리 듣는 이마다 평안을 이루소서’ 법정스님의 친필까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연중행사처럼 일 년에 서너 번은 간다. 신년에 새해 계획 세우러 한 번 가고, 또 한 번은 내 생일이 껴있는 단풍나무가 물드는 가을, 주말에 기차 타고 여행하는 느낌으로 간다. 신년에 갈 때는 책도 한 권 챙기고,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도 담아서 간다. 햇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서 가져간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덤으로 신년 계획까지 세우면 뿌듯하고, 보람찼다.
진영각은 원래 회주스님이 업무를 보는 행지실이었다. 지금은 법정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스님의 저서와 유품을 전시하는 전각으로 바뀌었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법회가 있어 오셔도 ‘쓸데없이 폐를 끼친다’고 하룻밤도 주무시지 않고 서둘러 강원도 오두막으로 가셨다. 본래무일물을 실천하셨던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하셔서 그런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계절에 상관없이 길상사 진영각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참 좋다. 그윽한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 시인 류시화의 <새와 나무>가 생각난다.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중략>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이지 않았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성마름을 자초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생일이라고 어수선 피우는 성격은 아닌데 엄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생일날 미역국 대신 극락전에 공양미를 둔다. 누구라도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나만 홀로 행복과 쓸쓸함 그 사이에서 불안해하며 끝없이 흔들리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 사이에 ‘엄마’가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엄마와 나는 늘 어색한 사이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어쩌다 꿈에 나타나면 여지없이 다음날 기분이 별로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이나, 후나 늘 불편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좋은 일이 계속되면 습관처럼 슬슬 불안해졌다. 인생이 마냥 ‘나를 행복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탓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돌아가신 엄마의 삶이 불쌍하고 측은해서 한바탕 울었다. 그날도 엄마 꿈을 꿨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예전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고 평온하고 평안했다.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 생각만 했었는데, 문득 ‘인생이 부메랑 같다’는 생각이 스치며, 내가 보내는 에너지가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늘 평온하기를, 평안하기를 원했다. 또한 반 박자 느긋하게 살기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끝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내 마음과 생각도 결국 나였다. 행복은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얼마나 깊이 집중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오늘도 요동치며 흔들리는 행복한 하루가 나에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