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포티 이야기

by 송백경

나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반대로 길게 풀어쓰는 쓰잘 때기 없는 잔재주를 갖고 있어. 자 오늘은 이 잔재주로 ‘말’이라는 것에 대해 잠깐 사유할 시간을 가져볼까 해.

뭔가 대단한 것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야. 내 통찰력은 그리 깊고 섬세한 수준이 아니거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나랑 같이 한 번 생각을 펼쳐보자.

말을 한마디 단어로 정의해보자면 다들 뭐라고 답할 거야? 당연히 수많은 의견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

음... 나는 ‘말’은 곧 ‘약속‘이라고 생각해.

’ 말‘이 ’ 말‘로서 기능을 하게 해 주는 건 바로 저 암묵적 ’ 약속‘ 때문이지. 생판 모르는 사람과 새끼손가락 걸고 저에 대해 약속을 한 적은 물론 없지만 ’ 말‘이라는 건 한 국가의 구성원들 또는 해당 언어를 쓰는 불특정 다수들이 보편적으로 맺은 일종의 거대한 공동체 계약인 거야.

갑자기 어느 날 송백경이 정신이 나갔어.

정신 나간 내가 길을 걷다 마주 오는 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이유 없이 ”야이 시발놈아 “라고 말하면 난 틀림없이 ’ 시발놈‘이라고 지칭당한 사람에게 멱살을 잡히거나 심하면
몇 대 맞을 각오도 해야 할 거야.

우리는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나와 당신은 저 “시발놈”이라는 단어에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 시발놈‘이라고 욕먹는 이는 화를 내고 ’ 시발놈‘이라 욕한 이는 화를 입을 수도 있지.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발이라는 단어를 우리나라 최초자동차의 이름 시발‘始発‘로의 의미로만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고 쳐보자.

그 사람에게 다가가 “야이 시발아”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네~안 그래도 이제 새로 다시 시작할 참이었는데 어떻게 아셨나요?”라고 되물어 올지 몰라.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윗 상황에서 우리가 통속적으로 알고 쓰는 ‘시발’이라는 욕은 그 기능을 잃게 됐어.

같은 단어의 뜻을 서로 전혀 다르게 알고 있다는 건 약속이 깨진 것 아니 애당초 약속조차 한 적이 없는 거거든.

이렇게 말이 약속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면 그건 그냥 동물의 울음과 같은 ‘소리’에 불과할 뿐이야. 안 그래?

타인이 나의 성격, 인성, 교양, 유무식에 대한 것들을 판단 및 파악하려 할 때도 우리들의 언행은 가장 기본적인 채점요소로 작용돼.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다 빨강 색연필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게끔 쥐고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은밀히 OX점수를 매기지.

평가항목들은 저마다 각각 서로 판이하기 때문에 그 기준은 상대적이고 결과는 주관적에서 벗어날 수 없어.

말은 누구나 구사할 줄은 알지만 그 누구나를 이루는 수많은 각 개체는 모두 서로 다른 성격과 인상을 지니고 있고 그들 각각이 가진 어휘력의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말 몇 마디”쯤 나누고서 상대방을 추측해서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옳을 수도 또 그렇다고 언제나 틀릴 수도 없어. 참 애매모호하지.

다만 이런 건 있어.

우리가 욕과 비속어를 늘 입에 달고 다니고 패드립을 일삼는 사람에게 '넌 어떻게 하루 종일 입에 걸레짝을 물고 사냐. 넌 부모도 없냐. 쯧쯧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학교 도덕시간에 그와 같은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야.

개나 소나 쓰는 말일지라도 예의범절과 도덕의 기준, 틀 안에서는 절대 기준과 객관성을 가지게 돼.

또 뭐가 있을까..... 말의 이미지? 말의 본질적 성질? 그런 거는 어떨까?

그에 대한 어떤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우리가 쓰는 말들이 국어사전에 딱 담겨 정형화되어있으니 무슨 무기물 고체와 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늘 거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저 경복궁 뒤 인왕산처럼.. 불변의 어떤 단단하고 무거운 느낌.

근데 사실은 이 말이라는 녀석은 자기를 담은 틀의 모양에 따라 모습이 이래저래 바뀌는 액체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좀 더 전개해 보자면 터미네이터 T1000 같은 악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요리조리 시간의 흐름, 시대적 상황, 필요와 요청에 따라 그 형태를 계속 바꿔가는 부드러운 어떤 유기체. (근데 T1000은 액체"로봇"이니 엄밀히 말하면 유기체는 아니잖아. 자가당착이네... 미안)

자 이왕 유기체로 표현했으니 좀 더 밀고 나가 상상해 볼게

그럼 살아있는 이 말이라는 녀석의 성격은 어떨까?
착하고 사람을 돕는 헌신적 이미지?
이런 포지티브 한 모습으로 상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라.

내가 볼 때 얘는 성질이 좀 고약한 면이 있는 거 같아. 약삭빠르고 간사하고 변덕도 부리는데 때에 따라서는 냉혹한 행패도 저지르고 말이야.

자기 필요할 땐 신조어 따위 늘 잘도 만들다가도 필요 없어지면 "사어"라는 이름을 붙여 도려 없애버려.

쉬운 말로 죽여 없애버린다는 거야.

여기에 더해 힘센 권력자 눈치도 볼 줄 알아서 간사한 박쥐처럼 자기가 원래 가져야 마땅할 뜻을 요래 저래 필요에 따라 180도 바꾸기도 해.

나는 얘의 어떤 면이 가장 싫으냐 묻는다면 "븅신 같은 모습을 띠는 신조어를 멋대로 마구 만드는 습성"이라고 답할 거야.

문명사회에서의 신조어 탄생은 필연적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는 현상이고. 신조어 자체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찰걸?

인간은 늘 유무형의 무언가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성향을 기본 셋팅값으로 지니고 있잖아.

현대사회에서의 신조어 탄생 속도와 그 양은 산업혁명 이전 사회보다 수십 아니 수백 배나 더 빠르고 그 양도 훨씬 많을 거야.

과학과 기술이 사회에게 윤택함을 제공하고 그걸로 지탱되고 발전해 나가는 세상이니 거의 매일 만들어지는 신조어는 오히려 공부의 대상이라고 생각해.

다만 내가 싫어하는 신조어는 정체불명의 상판때기를 가진
좀 많이 모자라고 멍청해 보이는 녀석들이야.

대표적으로는 서두에 쓴 저 "영포티"

이거 실은 내가 며칠 전 경험한 일이기도 해

저번주쯤 인스타에 올린 내 글에 어떤 사람이 답글을 달았어.

"저게 어떻게 저걸로 읽히지? 아저씨 눈알 몰렸어요 사시예요?" 난 저걸 충분히 무시하고 넘길 수도 있었는데 괜한 발동이 걸렸는지 "지금 나한테 시비 터세요?"라고 물었어. 잠시 후 "네~^^" 이 지랄을 하더라고.

나도 질세라 "ADHD를 AIDS 나한테 메시지 보낸 그 사람은 그럼 뇌가 몰린 거냐"라고 답한 후 연달아 걔한테
"잡았다 요놈 요요 히드라 녀석 아이디 바꿔 들어와서 댓글 달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이랬더니

"부들부들 아재. 영포티^^"

이 댓글을 달고서 튀더라고.

나는 지난주까지 이 영포티가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

나한테 영포티 하니깐
"얘가 나한테 먼저 시비 걸어놓고 끝에 가서는 또 칭찬하네. 다중인격자야 뭐야" 이렇게 생각했어 진짜로.

아재야 내가 아저씨라 불려도 될 나이니깐 저 호칭에 기분 나빠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고... "영포티? 나 꺾인 40대인데 오~~ 나를 젊게 봐주고 있네. 음~젊은 40대라... 그래도 히드라가 최소 에티켓 정도는 지니고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였단 말이야.

자... 아까와 같은 상황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네?

얜 나한테 비난 조롱을 담아 '영포티'라고 한 건데
난 얘를 그래도 마지막 에티켓쯤은 지킨 사람으로 인식했지.

이게 대화야? 이게 말이야?

'영포티' 이건 뭐 신조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냥 동물울음소리에 지나지 않는 개븅신 같은 사운드일 뿐이야.

걔는 나 기분 나쁘라고 영포티 이랬겠지만 난 기분이 전혀 안 나빴어. 걔의 의도가 담긴 행동은 결국 실패한 거야.

최소한 욕을 하려면 서로 뜻을 아는 한에서 내뱉어야 공방의 소통행위라도 할 텐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출처도 불분명한 영포티? 저따위 말을 도대체 누가 만드냐고?ㅜ누가 만들어? 누가 만들 것 같애?

사람이 서로 소통가능한 말을 해야지 의미는 개똥 아무것도 없는 짐승소리를 내서야 되겠어?

며칠 전 초딩2학년인 우리 큰 애가 나한테 와서
"앙 기모띠" 이러길래 "루빈아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물었거든. 무슨 뜻인지는 모른대. 흔한 남매? 뭐 암튼 유튜브 영상에서 듣고 배웠다는 이야기에 내가 잠시 한동안 머리 위 뚜껑을 손으로 꾹 잡고 있었어.

우리 대화를 하자.
속어를 쓰더라도 욕을 하더라고
최소한 우리 서로 아는 말로 하자.

니들끼리 만들어놓고 니들끼리 일방적으로 쓰며 니들끼리만 킥킥대지 마. 야비하고 비열한 걸 떠나 지능이 한참 모자라보여.

영포티....

너넨 40대 안될 거 같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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