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코모리: COVID-19와 히키코모리를 합친 합성어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반 강제적으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국경 앞의 코모리
남은 1년간의 학업을 위해, 출국을 결심했다.
그동안 수업이 줄곧 온라인으로만 진행되는 탓에 차라리 한국에서 신혼을 즐기며 방구석 유학러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나갈 곳 없고 만날 사람 없이 한 공간에온종일 머물러야 했지만, 그나마 '할 일'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결심한유학을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는 일. 남편과 나는 상의 끝에 남은 1년 만이라도 현지에서 공부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곳에서도 코모리 생활은 면하지 못할 것 같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부터 단계적 롱디를 경험해 왔다. 굳이 단계적이라 표현한 이유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그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 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으로 4-50분 거리일 때가 가장 양호했다. 그다음엔 지하철이 아닌 기차를 타야만 했고, 각자 군대와 미국으로 흩어졌을 때엔 정반대의 시차와 어색한 환경을 견뎌내며 꿋꿋이 서로의 시간을 이겨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에야 헤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을 붙어 지낼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또 떨어져 지내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남편은 남은 군 복무를, 나는 남은 학업을. 이미 몇 차례 겪어 온 일이지만, 힘든 선택인 건 여전했다.
결정은 내렸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눈치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코로나는 변이종을 계속 만들어냈고, 나라별 방역 수칙, 출입국 규정, 그리고 학교의 지침은 언제 어떻게 바뀌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불안정한 상태 위에 놓여있었다. '가도 되는 건가, 괜찮은 거 맞나'라는 고민이 끊이질 않았지만, 확실한 답을 과연 누가 해줄 수 있겠는가.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학교 측에서도 '언제든 온라인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다음 학기에도 여전히 비대면 수업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으며, 부스터 샷을 맞거나 매주 음성 확인서를 지참하지 않고서는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미 타 지역 학교들 중 일부는 비대면으로 전환하기도 했고, 학교들 간에도 눈치게임이 진행 중인 모양새였다. 이러나저러나, 갑작스러운 락 다운으로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학교 기숙사나 셰어 룸보다는 온전히 독립된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준비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확신이 들었다. 국경을 넘어도 난 계속 코모리 신세겠구나,라고.
락 다운과 동시에 시작된 칩거 생활이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국경 앞에 서 있는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변한 것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 코모리로서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적응해버린 스스로일지도 모른다. 멈춰있는 환경을 견뎌내는 것. 타인과의 교류 대신 온전한 나와 대면하는 것. 굳이 겪을 필요 없지만 구태여 겪어야만 했던 이 시간들을, 헤아려보니 어느새 2년이나 겪고 이겨낸 셈이었다. 국경을 넘어 마주한 그곳이 '어서 와 해외 코모리는 처음이지'라며 두 팔 벌려 날 반기더라도, 어쩌면 생각보다 잘 버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코로나에 대한 면역은 없지만 격리에 대한 면역은 생겼다. 굳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어느 한 가지에라도 면역이 생겼다니 그 정도면 다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