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허무주의 사상과 보스턴 차 사건 그리고 시지프 신화
나는 문득 과거를 생각했다. 가끔씩 이런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꽤나 곤란하다.
어디에 간다거나, 무언가 중요한 약속이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화장을 고친다.
화장이 지워져버린 부분을 다시 커버한다.
나는 피부가 꽤나 하얀 편이다. 내 피부에 맞는 쿠션으로 잡티를 커버한다.
이젠 센터에서 나가야 하므로, 아이들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한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3시 정도이다. 나는 피부 화장을 수정한다. 쿠션과 컨실러로, 그리고 입술이 많이 텄기에 입술에 립밤을 발라주고, 뒤에 있는 발코니로 가서 바람을 쐰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잠깐 정신을 가다듬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나는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조금 피곤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누워 계속 자고 싶은 종류의 피곤함도 아니다. 그냥 몸이 조금 뻐근한 느낌의 피곤함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오늘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5시정도에 예약해둔 레스토랑이 있다.나는 랍스터를 먹기로 결정했다.
내 음식 취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사실 음식을 크게 가리는 편은 아니다. 아무거나 줘도 다 잘 먹는 느낌에 가깝다. 그렇지만 예전의 내 친구는 해산물이라던가 그런 요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어서 같이 여러 음식점에 가곤 했다. 예전에 친구와 함께 미국 여행을 갔었던 날, 약 10일간 우리는 다양한 음식점에 갔지만 미국이어서 그런지 음식들이 굉장히 느끼했었다. 너무 느끼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피자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사방이 온통 피자였다. 물가도 당시 굉장히 높았었기 때문에, 주머니에 돈이 충분하지 못한 우리는 6달러짜리 피자를 먹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른 음식들은 20달러를 넘어갈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제 성장이 계속 지속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물가가 한국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우리는 그래도 피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피자를 먹었다. 나는 멍을 때리면서 2층 발코니에 몸을 기대며 생각을 계속한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이국 메사추세츠의 보스턴에 있었다. 보스턴은 과거부터 항구 도시로 매우 유의미한 곳이었다. 보스턴의 역사는 꽤나 길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중심 도시이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과거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가 있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고, 하버드대학교와 MIT와 같은 유명한 대학교도 보스턴에 있는 유명한 대학교들이다. 1636년에 세워진 하버드대학교는 지금까지도 세계에 널리 이름을 날리고 있다. 행정구역상 보스턴은 2018년을 기준으로 인구가 70만 정도이고, 주변부를 포함하는 보스턴 도시권에는 약 48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구한 역사의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보스턴 지역은 뉴욕과 함께 1850년 이후 아일랜드 감자 기근을 피해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주요 정착지였다고 한다. 뉴욕은 보스턴과는 다르게 네덜란드계, 이탈리아계, 유대계, 흑인계, 히스패닉계 등 주기적인 인종 대격변이 벌어졌지만 보스턴은 그런 일이 드물어서 여전히 아일랜드계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한다. 지역 사회의 포 보스턴은 미국 독립전쟁의 신호탄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전쟁 초기 영국군과 독립군이 치열하게 맞붙던 곳이기도 하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12월 16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매사추세츠 주민들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 상자 342개를 보스턴 항구에 던져 폐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는 영국의 차 과세 정책에 대한 반발로, 미국 독립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영국은 1773년 차법(Tea Act)을 제정해 동인도회사에 차 독점 판매권을 부여하고 식민지에 차 수입 시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식민지 주민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고, 그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정책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영국과 식민지의 사이는 점차 틀어져 갔고, 결국 1773년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급진적 독립운동 단체 소속 60명은 인디언 복장을 하고 선박을 습격해 차를 바다에 투적했다. 인디언 복장을 한 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차를 바다에 버려버릴 계획을 꾸미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면, 왠지 기묘한 기분이 된다. 영국은 이 사건을 당연히 좋지 않게 바라보았다.
영국은 이 사건을 ‘보스턴 학살 사건’으로 규정했다. 영국은 ‘강제법’을 통과시켜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고,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영국에 대한 저항은 본격화되었다. 1775년의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1776년 독립선언서 발표로 이어졌다. 보스턴 항구를 바라보면, 물론 랍스터 요리와 함께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과세 문제에 화를 내고,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정책들에 분노를 표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사람들과 그때의 사람들은 어느 부분에서 차이를 가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발코니에서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 놓는다. 이제는 다시 내려가야 한다. 빨리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2층에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진다. 아까 전에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이 데리러 오신 것이 이유일 것이다. 문을 열고, 약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왜인지 고독한 느낌이 든다. “인생은 원래 고독한 거다”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떠오른다.
쇼펜하우어는 고독을 즐겨야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사상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는 염세주의적이고 비극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이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계보를 이은 철학자들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그것에 실패했다. 사실 나도 한때 염세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다. 세상은 비극으로 온통 가득 차 있고, 나는 그 비극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때로 현실은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을 때가 있다. 나는 허무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 사상이라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질없고, 비극적이며,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그러한 사상이다. 하지만 허무주의 사상가들은 그 점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 세상에게 지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시포스의 형벌이 그 예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받은 영원한 노동의 상징이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쇠사슬로 묶어 인간 세상에 죽음을 없앤 뒤로 지하세계에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충격적인 것은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더라도 다시 굴러 내려가, 시시포스는 이 무의미한 반복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했다는 점이다. 카뮈는 그 모습을 부조리의 상징으로 보며, 절망 속에서도 도피하지 않는 삶의 태도인 ‘반항’을 역설한다.
그는 ‘자살’하지 않고 이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반항으로 보았다. 나도 초의 책을 읽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카뮈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이런 그에게 공감한다. 부조리를 이미 깨달은 ‘나’와 같은 사람은, 자살하거나 체념하거나 우울증 하나를 하게 된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면서 살아가면 스스로만 더 힘들어진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존’하는 것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지프가 무거운 돌을 정상으로 올리면서 돌을 정상에 올리는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그 돌이 다시 바닥에 떨어져 비교된다면, 시지프는 그리고 우리는 분명 절망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자체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사실 나는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석과 돈,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이런 비극적인 인생에 있어서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만나는 것—그저 그것뿐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힘들더라도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돌을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옆의 누군가와 삶에 대해서 한담해 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열심히 해보자고 이야기해보기도 하고, 돌을 양손으로 밀면서 옮겨보기도 하고,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조금 쉬어갔다가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