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에 살아본 적 있나요
“다 거짓말이야 몰랐어 이제야 알았어 네가 필요해.“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습했으며 때론 울적했다. 좁은 창틈을 비집고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거대한 공룡의 발자국 소리마냥 내 머릿속을 쿵쿵 헤집어놓았다. 십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은 선명하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빅뱅의 거짓말. 부풀리지 않고 그 방에서 정말 천 번이 넘게 들은 것 같다.
화려한 번화가에 위치한 고시원에 산다는 건 생각보다 더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을 동안 친척집에서 한 달 신세를 지면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서울 살이. 하지만 운 좋게도 수원에서 경력을 위한 트레이닝 기회를 얻게 되었고 타지살이는 생각보다 더 길어지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언니의 집에서도 잠시 머물렀지만, 2주일의 시간이 지난 후 그건 잘못된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살을 부비고 사는 부부끼리도 종종 다툼이 있는데, 좁은 원룸에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건 좋았던 관계마저 망가지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급하게 집을 알아보았지만, 단돈 백만 원으로 상경했던 나에게 원룸의 보증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수원역 근처 고시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나의 선택은 그나마 보증금이 제일 저렴한 번화가의 낡은 고시원. 주변에는 술집, 노래방, 나이트 클럽 등 각종 유흥시설이 즐비한 곳이었다. 사실 당시 수원역 인근 환경은 그리 좋은편은 아니었다. 번화가인 로데오 거리는 종일 조명의 열기로 뜨거웠지만, 어둠이 깔리면 왠지 모를 음침함이 수원역 인근을 애워싸는 듯 보였다. 인근 화성시에서 흉흉한 사건 사고가 많았던 게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차라리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의 고시원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시원 주인이 친구의 지인이라는 점 또한 결정에 한 몫을 했다. 2007년 4월, 수원역 근처 고시원...설렘반 걱정반, 생계를 위한 나의 타지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곳은 타 고시원에 비해 시설이 깔끔했다. 전기밥솥의 쌀밥과 날계란이 무료라는 점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공용부엌에서 쌀밥에 계란 후라이를 해먹으면 대충 아침은 때울수 있겠네.’
하지만 여성전용 고시원이 아니라는 한계점은 있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한 건 화장실과 샤워실. 샤워시설은 생각보다 더 암울했다. 남녀공용이었고 화장실과 샤워 실이 얇은 벽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옆칸의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는 곳이었다. 샤워 한번을 맘 편히 하기 힘들었다. 오 분 만에 대강 물로 몸을 훔치고 나와야 했고 젖은 빨래는 옥상에 널어둘수 없었다. 말리는 족족 내 옷들이 사라졌다. 옷도 도둑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시원 생활을 하며 알게 되었다.
관짝같이 좁은 1인용 침대, 눈을 감으면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리고, 눈을 뜨면 반짝이는 네온사인에 눈이 부셨다. 방에 걸어놓은 속옷은 이틀을 둬도 마르질 않았다. 종일 달달거리는 창문형 에어컨의 소음과 열기도 심란한 마음에 소란함을 더했다. 그럼에도 꿋꿋히 이어간 고시원살이.. 하지만 그 생활도 채 세달을 넘기지 못했다. 새벽 7시부터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말라빠진 편의점 김밥을 씹어 삼키는 일상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너 돈 부족하지 않아? 얼마 안 부쳤어. 자리 잡으면 갚아.”
내가 돈이 없다는 걸 아는지, 친했던 친구가 대뜸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에 씹고 있던 김밥을 죄다 뱉어 버렸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우울증이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무급 수습기간이 지나고 열정페이를 받자마자 나는 황급히 그 고시원을 탈출했다. 마음의 병이 나를 따라오기 전에.
몇 년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며 다시는 타지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지만, 삼년 후 나는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힘들었던 자취생활은 지금도 좋은 안주거리가 된다.
어쩌면 힘들었던 기억도 꿈을 머금었다면 추억이 될 수 있는걸까. 한발 한발 고난의 발자국들이 나에게 내공이 되길. 하지만 사십이 넘은 나는 여전히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