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랑 화해하면 안 돼? 둘이 싸우는거 싫어.”
“우리 싸운 거 아니야. 너도 친구랑 투닥거리잖아. 엄마 아빠도 그런 거야.”
매번 명절 전날이면 찾아오는 명절증후군. 이번 설도 그랬다. 나의 시댁은 전라남도 나주, 부산 우리 집에서 버스로 네 시간 거리에 있다. 유난히 연휴가 길다는 2025년 작은설 전날, 시댁에 갈 짐을 챙기던 나의 분노가 그만 폭발해버렸다.
“아니, 자기는 왜 매번 짐을 쌀때마다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아까부터 진짜 왜 그래? 내가 얘기했잖아. 겨울이라 옷이 두꺼워서 짐이 많은거라고. 일할 때 입을 옷이랑 잠잘 때 입을 트레이닝복 딱 두벌 챙겼다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면 되잖아.”
“오랜만에 시댁에 가는데 어떻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챈걸까, 아홉 살 아들이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한다. 아이 앞에서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차 싶었다. 남편의 구겨진 얼굴을 보더니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손목을 힘차게 잡아끌기 시작했다.
“엄마아빠, 아직도 화해 안했어? 빨리 손잡아.”
덕분에 억지 화해를 했지만 둘 사이의 어색함은 숨길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4시, 요란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일사불란 준비를 끝낸 우리는 잠이 덜 깬 아이를 데리고 6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차라 그런지 길이 뻥뻥 뚫려있었다.
'버스 여행 왔다고 생각하자.'
차안에서 글을 쓰다 졸다 다시 글을 쓰고...
그래, 다시 생각해보면 머나먼 시댁 덕분에 이렇게 버스여행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등버스라 자리도 편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맛있는 간식도 먹고... 이 시간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명절이 내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광주에 도착하자 더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주에 오자 눈발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이는 신이 나서 장갑을 끼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멀대같은 사촌형에게 맹랑하게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다. 눈덩이는 검은색 패딩 위에 새하얀 손자국을 남겼다. 아이는 뭐가 좋은지 깔깔대며 웃어댔다. 시골집 마당에는 어머니의 나무와 화분들이 빽빽이 있었는데 가지 끝마다 하이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어머, 눈꽃이 피었네. 너무 예쁘다.”
슬레이트 지붕위에도, 장독위에도, 평상에도, 초록색 강아지집 위에도...
‘카메라에 다 담아가야지.’
나는 연신 핸드폰 셔터를 눌러댔다. 현지인들은 눈을 쓸기 바쁜데 부산에서 온 우리는 눈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제사준비 때문에 일찍 잠이 깬 내가 무심코 문을 열었는데...
‘와...눈 세상이 되었네.’
수북이 쌓여 시골 마당을 뒤덮은 하얀색 눈. 펄펄 눈 내리는 푸른 새벽의 시골집, 그리고 그 눈길 위에 뽀드득 뽀드득 내 발자국. 명절이 내게 주는 두 번째 선물이었다. 순백의 설날 아침은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궂은 날씨 덕분에 성묘를 못가게 된 우리는 일정을 당겨 오후 버스를 타게 되었다. 배웅을 나온 어머니는, 우리가 멀어질때까지 눈을 맞으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셨다. 나주 터미널까지만 태워준다던 큰형님과 작은시누는 마음이 쓰였는지 결국 우리를 광주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셨다. 나주에 올 때도, 그리고 갈때까지 매번 신세를 지다니.
“올해는 차를 꼭 사야겠어요. 매번 죄송하네요.”
큰 아주버님이 들릴 듯 말듯 나지막이 대답하셨다.
“안사도 돼.”
운전석 아주버님의 어깨가 한없이 넓어 보였다. 일찍 돌아가신 시아버님 대신 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하셨으나, 아주버님께 남편은 미우나 고우나 애가 쓰이는 막둥이 동생이 분명했다.
‘이런게 가족인가...’
가족...명절이 내게 주는 세 번째 선물이었다. 조건 없이 내어주는 유일한 존재. 때로는 서로를 가장 아프게 하지만, 삶을 이어가는 든든한 버팀목임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하얗게 흩어진 시간들. 하지만 시선을 돌리니 모든 순간이 선물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하루,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그 속에서 의미를 붙잡을 수 있기를. 오늘따라 창문에 스치는 풍경이 꿈결처럼 번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