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와 같은 PC통신이 처음 서비스되었던 20세기 후반, 온라인콘텐츠가 조금씩 성장하던 그 시절 역설적이게도 책대여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생산되는 콘텐츠를 제대로 즐기기에는 오히려 오프라인이 더 유리한 -다운로드보다 책 대여가 더 빨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시절에는 낯선 장르의 소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꾸준히 사랑받던 무협지의 아성을 무찌르고, 그 시절 우리 7080세대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새로운 장르는 바로 '판타지'였다.
노르딕 신화 같은 곳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요정이나 마법 같은 것들을 소재로 하는 판타지는 정말 이름만큼 낯설고 환상적인 콘텐츠였다. 배경 자체가 신선하기도 했지만, 웹을 기반으로 성장한 만큼 초보 작가들에게 비용부담이 없어서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장르였기 때문에, 비록 얄팍하지만 소위 뼈를 때리는 주제들을 담고 있었고, 그런 직설적인, 어떻게 보면 조금은 유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메시지는 판타지 소설을 더 빠르게 유행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현대 판타지, 차원이동 등 다양한 유형의 판타지가, 소설은 물론 웹툰이나 영화, 심지어 드라마와 같은 문화 콘텐츠의 배경으로 명실공히 자리 잡았지만, 30년 전만 해도 우리가 아는 마법사는 신데렐라에게 호박마차를 만들어 준 할머니 정도였다. 원래 용은 구슬을 좋아하거나 서쪽바다를 수호하는 신(神)적인 존재였는데, 판타지는 용을 아파트 단지에서 짖어대는 치와와만큼이나 하찮게 만들어 버렸다.
판타지라는 이상한 장르가 예고도 없이 책대여점을 점령할 수 있었던 데에는, 드래곤라자 라는 소설이 첨병 역할을 하였다고 자신한다. 여느 판타지들과 마찬가지로 PC통신에 정기적으로 게재되었던 웹소설이었는데, 은근히 톡톡 쏘는 유머, 문장 전반에서 느껴지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정서가 당시의 감성을 꿰뚫었고, 아직까지 그만큼 몰입할 수 있었던 정통판타지는 없을 정도로 스토리와 서술방법이 탁월했다. 물론 이상문학상이나 부커상 수상작처럼 엄청난 문학성을 가졌다고 평가되지는 않았지만, 온 가족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오락물로서 판타지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집 책장에는 드래곤라자 전집이 굳건하게 꽂혀 있다.
이 글의 제목과 관계없는 판타지를 대뜸 운운하는 이유는, 학생, 군인, 직장인, 남편, 아빠 등 많은 신분과 다양한 위치를 살아 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 세워둔 생각의 잣대 중에 하나를 이 책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혹시 미처 찾아내지 못한 나의 역할이 있는지, 나의 희망이 진짜 권리인지 삿된 욕구인지, 이런 종류의 판단을 해야 하거나 그 판단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마다 필요한 잣대, 성인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어리고 멍청한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정립할 수 있었던 그 잣대가 이 책에 적혀 있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이렇게 세 어절을 써놓고 보니 중2병 걸린 사춘기 소년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요새말로 오글거리는 문장이라는 데에 전혀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힘든 수험생활 중에 벼락처럼 나를 관통했던 문장이고,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그만한 나이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던 문장이다. 지금은 차츰 늙어가는 가운데 가벼워진 의무와 무거워진 책임을 다하면서 아직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않도록 나를 위로해 주는 문장이다.
단수가 아닌 나를 관찰하며, 단편적인 나를 소개하는 짤막한 글을 연재해 보려 한다. 아마도 동의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견해와 편협한 사고로 가득 차서 읽기 싫은 경우가 많겠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평범한 사람이지 대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