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그러니까 응답하라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그런 시절에는, 컴퓨터를 제대로 구입하기 위해 많은 사전학습이 필요했다. 완성된 컴퓨터를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CPU부터 메모리카드까지에 이르는 부품을 일일이 구매하여 조립을 하는 방법이 더 대중적이었다. 더구나,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마이컴과 같은 컴퓨터 잡지 외에는 부품들의 사양을 비교하거나 가격수준을 파악할 방법이 없었고, 택배 문화도 없던 때였기 때문에 용산상가 등에 직접 발품을 팔아 하나하나 흥정을 해 가면서 구매를 해야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재밌기도 했지만, 소비자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컴퓨터 부품을 일일이 공부하고, 바가지 씌우지 않는 점포를 찾고, 애써 구비한 부품들을 오류없이 조립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품들을 하나하나 정교한 손길로 끼워 넣고, 파워버튼을 눌러 첫 부팅을 하는 그 쫀득한 긴장감은 정말 잊기 어려울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나중에 이런 컴퓨터 소비시장은 매직스테이션이나 트라이젬 등 완성형 컴퓨터의 브랜드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트북 보급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거의 사라져서 지금은 일부 매니아 정도만 그 낭만을 유지하고 있다.
이 당시에 컴퓨터 잘 아는 친구나 동네형님은 첨단 전문인력으로 대접을 받았다. 특히 PC통신 기반의 채팅, 고사양 그래픽카드가 필요한 게임의 등장과 함께 컴퓨터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들 전문인력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게 되었다. 이 전문인력들의 서비스 품질은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가 없었다. 펜티엄, AMD, DDR, 마더보드 같이 영어로 된 얘기를 듣고 있다보면 이 사람이 제대로 알고하는 말인지 그냥 어디서 주워듣고서 아는 양 떠들어 대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문인력들의 컴퓨터 구매 동행서비스는 사전예약이 필수였고, 종사자 대부분이 미혼 남성이었기 때문에 치맥, 소개팅 등을 대가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내 주변에도 컴퓨터에 반쯤 미친 공대생이 있었고, 이 녀석을 데리고 용산에 다녀온 덕에, 이 전문인력이 판단하기에는 제법 저렴한 가격으로 쇼핑을 마쳤다. 극적인 첫 부팅을 해내고, 이 친구와 동네 패거리 녀석들을 불러 저녁 술자리를 시작했다. 읽는이들도 예상하겠지만, 나는 말이 참 많은 편이다. 그 때 술자리에서도 공대생 녀석과 용산에 가서 본 것과 먹은 것, 흥정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 그날 하루와 컴퓨터에 대한 얘기로 패거리들과 밤이 깊도록 낄낄대고 있는데, 문득 공대생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재밌는 일이 그렇게 많았구나, 나도 하루종일 같이 있었는데 전혀 몰랐어."
자기도 똑같은 것을 보고 겪었지만, 이렇게 긴 시간 웃으면서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컴퓨터를 샀을 뿐인데, 듣고보니 무척 재밌는 하루로 느껴진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패거리 중 한명이, "거의 음유시인이지, 99퍼센트의 경험에 1퍼센트의 허풍을 섞어서 별 거 아닌 일도 재밌는 일로 만들어버리니까", "다 믿으면 안돼, 웃고 넘겨야지." 몇 번이나 내 허풍에 속았다고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는 친구도 있었다.
언제나처럼 난데없이 컴퓨터 얘기에서 음유시인까지 이야기의 방향을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시덥잖은 얘기를 계속 늘어놓는 내 꼴이 한심한 한편, 제대로 된 맥락인지 몇번씩 곱씹어가며 한줄 한줄 채워나가는 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게 여겨지는 이 기분을 어쩌면 혀를 차고 계실 여러분들께 설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말 재밌다. 진짜 소설책에 등장하는 음유시인처럼 재담꾼이 되고 싶다.
취업을 하고, 부모가 된 이후에도 재밌는 이야기가 생각나면 아무 종이에나 끄적거리곤 했다. 얼마 전 브런치를 알고 나서는 브런치에 짧은 낙서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로 글을 써왔는데 양이 늘어나면서 공개 여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재밌게 읽어주는 분들도 일부 있을 수 있지만, 글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온 월급쟁이가 주정하듯 늘어놓은 이런 글을 감히 공개해도 될 지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반백살 가까이 살면서 나름대로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형성된 만큼 개인적이고 편협한 생각도 함부로 담겨있다. 더구나 돈이 되지도 않으면서 영혼이 상처받을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합리하다. 그런데도 브런치에 글이 조금 모이니까, 종이에 글을 쓰고 구겨버렸던 때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마치 적금 만기가 다가올 때면 자꾸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이 정도면 여러분께 제 변명이 충분히 전달된 것 같다. 대부분 알아채셨겠지만 아까운 시간을 내어 제 이야기들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성심껏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중이다. 왜 그런 부족한 깜냥에도 계속 글을 쓰고 게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동네 친구들까지 팔아가며 원래 그런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무모한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적어둔 글들을 공개했을 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이 글까지 읽는 분이 있다면 '이게 글이냐 방구냐' 하고 차가운 댓글을 남기기 전에 '그래도 헛소리가 도박이나 마약 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나' 정도의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곡하고 정중하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