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이 다니는 학원은 우리집 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일반 주택을 학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이고, 베란다 창문에 대충 걸어둔 현수막 덕분에 학원인 줄 알 수 있다. 남들 다 보내니까 우리집도 학원에 보내기는 하는데, 길에서 시간허비하는 게 싫어서 우리집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동에 있는 학원에 보냈다. 비가 오거나 너무 추운 날은 지하주차장을 통해 갈 수도 있으니 더 좋았다. 어느 여름날 비가 많이 오는 오후였다. 거실에서 비오는 것을 보고 있는데, 따님께서 우산을 받쳐 들고 물 웅덩이를 겅중겅중 피하면서 집에 오고 있었다. 비오는 날은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좋을텐데, 왜 밖으로 다니냐고 물었더니, 딸아이가 자기는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지하주차장으로 학원에 가는 길을 모르겠다고 했다. 당황하고 화가 났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을 우리딸이 닮았다.
나도 지하주차장으로 딸아이 학원이 있는 동을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없다.
길치는 많이 불편하다. 그리고 불치병이다.
어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무빙'이라는 시리즈물을 방영했다. 작중 구룡포라는 인물이 있는데, 아무리 다쳐도 죽지않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친구가 지독한 길치였다. 대부분 시청자들은 구룡포가 길을 헤매는 장면을 다소 코믹하게 기억하겠지만, 나에게 구룡포는 정말 가엾고 안아주고 싶은 인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다. 집안 어른들이 눈물점이 있어서 눈물이 많은 거라고도 하셨지만, 항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은 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학교를 가다가 갑자기 길을 잃고, 똑바로 직진만 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다가도 길을 잃었다. 울면서 헤매다 익숙한 곳이 나오면 얼른 눈물을 닦고 집에 뛰어들어갔다. 늘 옆에 있던 남동생은 형이 울 때마다 영문을 모르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길 찾기는 최고의 난제였다. 친구들과 놀 때도 멀리가는 건 꺼렸다. 나를 잘 아는 친한 친구들은, 내가 고집을 부릴 때 "놓고 간다?"하는 우스개소리로 내 고집을 꺾어놓곤 했다. 그 때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정말 놓고 갈까봐 조금 무서웠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갔다. 낯선 도시에 가서 길을 헤매는 공포가 공부의 괴로움을 아득히 초월했기에 공부를 제법 잘 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출동 방향을 혼동해서 다른 병사와 부딪히거나, 선착순 달리기의 도착지를 찾지 못해 억울했던 기억도 있다. 다행히 항상 서두르고, 미리 준비해서 고문관은 면할 수 있었다. 직장인이 된 후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나는 내 물리적인 위치에 대한 확신이 없다. 사무실의 내 책상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 건물의 남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회식 때 화장실을 가면 회식하던 식당에 돌아오기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이 화장실 갈 때 따라나선다. 나의 고충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길이나 건물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다거나, 잘 모르는 곳은 지형지물을 외우면 도움이 된다는 둥 조언 비슷한 잔소리를 하지만, 매일 상처받고 아픈 내가 안해본 노력은 없다.
나는 무척 부지런한 편이다. 정리정돈을 좋아하고 생각한 위치에 물건이 있는 것을 좋아하다. 다른 사람들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정도로 이해를 하겠지만, 이동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많지 않다. 이동할 때는 이동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자료는 미리 가방에 잘 넣어둬서 자료를 찾느라 이동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한다. 어떤 회의나 출장이라도 적어도 30분 전 도착을 목표로 계획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한 후로는 처음 가보는 곳도 헤매지 않고 시간에 맞게 잘 도착하지만, 이 습관은 이미 몸에 배었다. 그렇게 나는 길치라는 불치병에 적응했다.
다행히 딸아이는 길을 모르는 대신, 좋은 친구들을 가졌다. 모르는 곳에 같이 가 줄수 있는 친구들이 많다. 어느 날 딸아이가 지하주차장을 통해 학원에서 우리집에 돌아가는 길을 학원친구가 알려줬다고, 같이 와줬다고 좋아했다. 이제 학원에서 우리집에 돌아올 수 있으니, 우리집에서 학원에 가는 방법만 숙달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폰 지도를 잘 써서 지하나 실내가 아니면 심각하게 길을 잃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딸도 불치병에 적응해 가고 있다.
나와 구룡포, 그리고 우리딸은 죽는 날까지 길을 찾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대부분은 순간, 앞장서지 못하고 항상 반걸음 정도 다른 사람보다 뒤에서 따라다녀야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도 좋은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와 함께라면 제법 재밌다고 얘기해 줄 수 있다. 지금 내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