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깍이 유학생 이야기 3

by 벅햄

자전거를 샀다. 지하철역까지 아내가 차로 데려다 주었었는데, 기름 값도 아깝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온 가족이 나 때문에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도 했다.


이른 아침 저 너머에서 살며시 고개를 들거나 이미 조금 떠오른 태양을 보며 자전거 패달을 밟는다.

1월의 아침 바람은 시원하기도 하면서 차갑기도 하다. 사회생활과 비슷한 것 같다. 사회에서도 사람들과의 만남은 즐겁고 시원하기도 하지만, 때론 차갑게 돌아서기도 한다. 나이가 먹어가니 이상한 잡념만 늘어나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역까지는 10분-15분정도, 아침에 정신을 차리기에 좋았다. 운동도 되고, 기름 값도 아끼고 다른 가족들은 쉴 수도 있으니 너무나 만족스러운 투자였다.


이른 아침 지하철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강남역을 향해 갈수록 사람들이 들어찼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앉아서 단어를 외워야 한다. 노이즈 캔슬링을 켜고, 음악을 듣는다.

단어를 외우고, 또 외운다.




지하철이 강남에 도착했다. 학원까지 걸어가는 길엔 가요를 들어본다. 내가 공부할 땐 지코의 '아무노래'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 음악을 고르기 싫어 인기 100곡을 들으면 거의 제일 처음 계속 나온다.

수많은 인파와 함께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귓속에선 '왜들 그리 다운돼있어?'라고 묻는다.

별로 신나지 않는 기분에 신나는 노래를 듣는건 어색하다. 창모의 '메테오'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보다.

그 두 노래가 자꾸 귀에 멤돈다. 토플 실전반은 조금 더 빡세다.

진도도 빠르고, 과제도 더 많아졌다.




새로운 스터디 그룹에 들어갔다. 지난번보다 더 상위의 반으로 들어왔는데, 나잇대가 더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스터디 그룹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지난번보다 더 어린(?) 친구들로 꽉 채워진 스터디 그룹.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또 들이 닥친다.

부끄러움인지. 수치심인지.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부러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그냥 입을 다물고 웃기로 다짐한다.

고등학생인 친구 2명, 대학생들로 구성된 스터디에 끼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자.

다들 실력이 좋다.

단어도 잘 알고 있고, 스피킹도 잘한다. 리딩과 리스닝은 말 할 것도 없다.

또 남의 뒤를 따라가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늘 그래왔던 것 같다.


어려서 피아노를 쳤다.

동네에서 나름대로 남자아이 치곤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늘 학원에서는 2등이었다.

늘 여자아이 한 명이 나보다 더 잘쳤다. 음악 이론공부를 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사실 학원에서 이론 평가 시험같은 것을 본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기분이 그렇다.)


집 안에서도 형이 늘 1등이고, 나는 2등인 기분.


학창시절 공부를 탁월하게 잘했던 것이 아니라 늘 나보다 앞선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었고,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를 잘한다고, 육상부와 축구부에 들어갔지만 어느 덧 전학을 온 다른 친구가 더 빠르거나 울며 떼를 써서 내가 가지고 있던 포지션을 양보하거나 바뀌었어야 했던 기억도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상태. 뭘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다. 문뜩 문뜩 정신을 차리고 목표는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에 늘 미지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대학교에서도 그랬다. 정말 잘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고,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늘 사이에 끼인 기분과 동시에 어중간한 나는 뭐라도 또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보였다.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교수님으로부터 전해들은 한국 대학교수의 현실은 어린 대학원생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대학원 졸업 후 이력서에 쓸 수 있는 학력란에 한 줄이 추가 되어 들어가게 된 곳에서도 나보다 먼저 입사한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제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도 편안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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