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쉼 없이 자신을 부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은 모두 유전 정보에 따라 새롭게 교체된다. 그러기에 생물체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시나브로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다. 정확하다고 믿는 유전 정보조차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다. 변형된 유전 정보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면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변할 수 있다.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려면 생명체는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는 '자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름휴가 중 10여 년만에 대학교 남자 동기들이 의기투합해 한 자리에 모였다. 많지도 않은 4명이 한 번 모이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어려웠던지! 대학 시절을 처음부터 함께 한 동기들을 만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어리숙하고 미래가 불안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을 우리는 함께 했다. 모이자마자 그 옛날 추억 조각을 머릿속에서 아낌없이 하나 둘 꺼내 놓기 시작했다. 세월만큼 조각난 기억 파편을 신나게 맞춰 보았다. 잊고 있었던 많은 사건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내 재구성되었다. 그렇게 모습을 갖춘 추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실이었다고 확실했던 기억조차 다른 기억의 파편과 만나서 자기만의 환상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기억이다. 그 기억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신경 회로에 흩어져 있으면서 서서히 뒤죽박죽 섞이며 왜곡된다. 기억에서 완전한 복원이란 없다. 동기들과 오랜만에 대면한 나는 더 이상 과거 속 몸과 정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만남은 흐려진 과거 속의 자아를 찾는 시간이다. 시간의 간극만큼 낯선 과거 자아는 분명 '나'의 존재에 대한 증거다. 동기들과 회포의 시간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자정을 넘은 시간이 야속할 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기약을 남기고 헤어졌다. 과거 청춘의 자아와 이렇게 또 잠시 이별했다.
청개구리 한 마리가 다시 찾은 나를 반겨 주었다.
2023년 8월 18일 금요일
길었던 한 달간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기대감을 가득 안고 송해공원을 찾았다. 공원으로 2학기 첫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방학 전과 다른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뜨거웠던 여름 열기는 선선한 바람으로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호수를 압도하던 강렬한 매미 울음소리도 가을 풀벌레 소리에 조금씩 묻히고 있었다. 딱정벌레는 풀잎을 기며, 잠자리는 떼 지어 하늘을 날며 새로운 계절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계정원의 많은 여름 꽃은 이젠 많이 져 버렸다.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가던 벌과 나비는 이제 환영으로 남았다. 져버린 꽃들의 공간은 높다란 잡초가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이번 여름 낮동안 공원을 찾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찬란했던 여름 정원은 그렇게 나와 이별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무 데크를 따라 옥연지 수변을 걸었다. 걸어가는 길에 작은 청개구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 녀석은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봄에 연못에 심었던 연은 노란 겹꽃으로 피어났고, 붉은 수련과 하얀 수련도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길가에는 메꽃이 가득 피어 나의 등장에 빵파르를 보내 주었다.
다시 찾은 송해공원은 나의 기억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송해공원의 생명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자연스레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간의 간격으로 생겼던 약간의 낯섦은 금세 친근감으로 채워졌다. 나는 공원의 변화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려 많은 관심을 보낼 것이다. 낯섦이 생겼던 간극은 금세 새로움으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