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에 잠식당한 채 방관할 것인가?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 우리가 사는 거리, 공원, 캠퍼스를 장식한 나무—그 키 크고 곧은 침엽수는 대부분 ‘메타세콰이어’로 불린다. 누가 정했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수삼나무’다. 중국 원산의 낙엽성 침엽수로, 북미의 세콰이어와는 전혀 다른 속(屬)의 생물이다. 단지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의 생물학자가 ‘메타(Meta, 유사한)’라는 접두어를 붙여 ‘메타세콰이어’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우리는 아무 비판 없이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공공기관이 나서서 이 외래어를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더 황당한 일은 ‘수삼나무’라는 토박이 이름을 ‘북한어’라는 이유 하나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북한에서 먼저 썼다는 이유만으로 자연 이름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는가? 정치가 언어를 지배하고, 언어가 생태를 왜곡하고 있다. 이쯤 되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자연에 대한 몰이해이자, 우리의 언어주권 포기 선언이다.
‘메타세콰이어’는 그럴듯한 껍데기일 뿐이다. 그 이름 속엔 우리 땅, 우리 기후, 우리 말은 없다. 오직 외래 지식과 식민적 시각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존재를 지우는 일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이 나무가 진짜로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학교는, 공공기관은, 언론은 ‘수삼나무’라는 이름을 정정당당히 써야 한다. 이름은 단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의 출발점이다. 잘못된 이름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태 교육이며 언어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