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듣는 소리, 마음의 화중(花重)을 깨우다

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

by 박동환

새벽녘, 잠결을 파고드는 ‘후두득 후두득’ 소리에 눈을 떴다. 아파트 베란다 수채구멍을 타고 흐르는 낙숫물 소리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음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 고향집 처마 밑에서 듣던 ‘비 듣는 소리’를 불러오는 신호였다. 잊고 지냈던 감각이 그 소리 하나로 되살아났다.


우리는 흔히 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비가 ‘듣는다’고 표현했다. ‘듣다’라는 말에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움직임의 생생한 감각이 담겨 있다. 처마 끝에 맺힌 물방울이 툭 떨어지는 순간, 그 짧은 찰나를 붙잡아낸 말이다. 언어 하나에도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점점 자연의 변화를 직접 체감하기 어려워졌다. 계절은 달력으로 확인하고, 날씨는 스마트폰으로 먼저 접한다. 그런 일상 속에서 빗소리는 드물게 자연이 우리를 직접 깨우는 방식이다. 창문을 두드리고, 배수관을 타고 흐르며, 우리 삶의 틈으로 스며든다.


빗소리는 묘하다. 물리적으로는 분명 소음에 속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른바 ‘백색소음’이라 불리는 자연의 리듬은 적막을 덜어내고, 우리가 이 세계와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을 회복시켜 준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음속에서는 수평의 안도로 퍼져나가는 경험. 그것은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봄비에 젖은 벚꽃과 도시 풍경.jpg

당나라 시인 두보는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봄비를 ‘때를 알고 내리는 기쁜 비’라 노래했다.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며 생명을 틔우는 비. 오늘날로 치면 미세먼지로 답답한 공기를 씻어내고, 메마른 도시를 잠시 숨 쉬게 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비가 지나간 뒤의 도시는 확연히 달라진다. 아파트 정원의 목련은 순백의 빛을 터뜨리고, 벚꽃은 거리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다. 두보는 이른바 ‘화중(花重)’, "꽃이 만발하니 봄의 무게가 확연한 순간이다"고 정의했다. 산수유와 개나리의 노란빛은 대지를 깨우는 신호처럼 번진다. 그 모든 시작이, 새벽을 깨운 빗방울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얼마나 감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무심함 속에서 계절의 신호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꽃들은 비를 맞으며 제 몫의 시간을 견디고, 결국 피어난다. 그 과정이 쌓여 ‘화중’이라는 장관을 만든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견디고, 기다리고, 때가 되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어난다. 다만 그 변화를 스스로 알아차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어제 새벽의 빗소리는 내게 그런 질문을 건넸다.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도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엇’이 있는가.


거창한 답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다만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보는 일, 그 작은 태도의 변화가 시작일 것이다. 비 듣는 소리에 귀를 열고, 그 안에 담긴 계절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다시 자연과 연결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일지 모른다.


이 봄날, 거리의 꽃들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도 작은 ‘화중’이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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