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에서 짐을 정리했다. 정리할 짐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한참을 비우고 쓸어냈다. 다음 주 한 주만 지나면 몇 년을 지내온 이곳을 떠난다. 추억이라는 말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고마움은 있다. 비바람을 막아주던 이 공간 덕분에 나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낼 수 있었다. 집은 벽과 천장이 아니라, 버틸 시간을 허락해준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술을 끊은 지 113일째다. 이 기록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증명은 말이 아니라 시간이 한다. 약속 역시 시간이 지나야 증명 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결과가 아니라 시간을 붙들고 있다. 그 시간 위에서 하루를 건너가고 있을 뿐이다. 달라진 나를 붙잡고 말이다.
짐을 정리하고 영어 공부를 하다가 마음이 심난해져 글을 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감정은 피했을 것이다. 힘들면 도망쳤고, 숨을 곳을 찾았다. 지금은 숨지 않는다. 결과는 내가 만들 수 없지만, 결론 이후의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상황이 좋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변했다고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만큼은 달라질 수 있다.
여전히 다리는 떨리고 심장은 빠르게 뛴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삶에 충실하려 할 뿐이다. 그게 세상을 맞서는 유일한 길이니깐.
불필요한 단톡방을 모두 나왔다. 한 번 더 관계를 정리했다. 외로움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소음이 내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사람을 가려 만나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은 나 자신이다.
한동안 10년 뒤의 목표를 정하지 못했다. 54세라는 숫자가 괜히 늦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안에는 비교와 열등감이 숨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앞서가는 사람들, 더 안정된 삶을 사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자꾸 작아졌다. 44세에, 내세울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그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군에서 나올 때 목표가 있었다. 10억을 벌겠다는 다짐이었다. 시간이 흘러 빚 6억을 갚았고, 남은 자산을 정리해보니 5억가량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잊고 있었지만,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나도 존재 했다. 나는 생각보다 끈질긴 사람이었다.
이제 돈은 목표가 아니다. 나는 가족을 원한다. 지킬 수 있고, 쉴 수 있고,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울타리 같은 가족. 돌이켜보면 나는 늘 그것을 갈망해왔다. 잘못된 선택으로 희망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러나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번에는 지키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몇 해 전, 산속 스님이 나오는 다큐를 보다가 오열한 적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불공을 드리고, 마당을 쓸고, 밥을 짓는 평범한 하루였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울었다. 나는 평안을 갈망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품에 기대어 쉬고 싶었던 것 같다. 찾아온 사랑 덕분에 잠시 평안을 맛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또 숨어버렸다.
이제는 숨지 않겠다.
여전히 간절하지만 숨지 않겠다.
상황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겠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려 한다. 분명한건 아직도 미생이지만, 그럼에도 이번엔 절대 도망치지 않겠다.
오늘을 기록하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