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해방.

by 재윤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졸음이 밀려왔고, 애써 피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천천히 잠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순간, 불연듯 한 생각이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나는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고, 나는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미워했을까. 아버지가 미웠고, 엄마가 미웠다. 나도 남들처럼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러면 어쩌면, 나도 조금은 더 안정되고 평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바람이 내 안 어딘가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열등감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나는 사람에게 충성했고, 버림받았고, 상처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사랑받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힘들다는 말로는 부족한 내 마음을 누군가 다정하게 어루만져주길 바랐다. 왜 나는 늘 나의 시선을 남에게 두고 살았을까.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다. 나 살아 있다고, 나 여기 있다고, 나에게도 힘을 달라고,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말라고.


그런데 문득 멈췄다.


그들은 그들의 선택에 책임을 지면 된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면 된다. 세상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좁은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었다. 나를 괴롭히는 방식이 가장 익숙했고,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술에 기대고, 나를 망가뜨리는 선택을 하며 세상과 대적하려 했다.


하지만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욕을 해도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그걸 지금 깨달았다.


졸음이 이내 사라졌다.

안개처럼 흐리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 생각이 깊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본질은 변한 적이 없다. 폭력도, 상처도, 배신도, 욕망도 여전히 존재한다. 발전은 있을지 몰라도 본질은 같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아파했던 것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던 것도 결국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지의 문제였다. 내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바꾸는 열쇠 역시 내가 쥐고 있었다. 감정도, 언어도, 반응도, 선택도 모두 내 것이었다.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달라졌다. 시선이 달라졌고, 해석이 달라졌다.


이제 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지면 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었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사랑한다.

이 말을 나에게 건넨다.

눈물이 흐른다.

뜨거운 눈물이다.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무언가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눈물이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나는 오늘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생각에 머물던 깨달음을 글로 남긴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선언이 아니라,

나에게 보내는 약속이다.


2026년 2월 15일.

오늘이 나의 해방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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