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 위해
지나고 나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때가 있다. 하루하루는 더디게 가는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어느새 많은 시간이 지나 있다. 살아온 날들이 이만큼 쌓이고 나니, 삶이란 결국 특별한 사건 몇 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심히 흘려보낸 하루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자꾸 앞으로를 생각한다. 미래는 멀리서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오늘이라는 하루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을 조금 더 성실히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10일간의 싱가포르 출장을 마치고 오늘 아침 돌아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도 하고, 조금은 쉬기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서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가졌다. 그런데도 지나고 나니 역시 짧게 느껴진다. 아마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결국 시간의 길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온도를 기억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행복을 자주 느끼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행복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예전에는 행복이란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거나, 큰 목표를 이루거나, 오래 바라던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친구와 밥 한 끼를 함께 먹는 순간에도, 무심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도, 문득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장면에도 일부러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그렇게 이름 붙인다고 정말 삶이 달라지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변화는 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바라보려 애쓰다 보면 하루가 전보다 조금 더 감사함으로 채워진다. 감사가 쌓이면 마음의 결도 조금씩 달라진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거창한 결심보다 자주 반복한 생각의 방향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그 가능성을 믿어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 귀인 덕분에 차를 새롭게 배웠다. 예전의 내게 차는 그저 마시는 것이었다. 목을 축이고, 향을 느끼고, 잠시 쉬어가는 정도의 행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천천히 차를 따르고, 잔을 바라보고, 향을 맡고, 한 모금 삼키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묘한 고요가 있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내 호흡을 들여다보는 시간 같았다. 마음이 먼저 가라앉고, 생각이 천천히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지혜를 하나만 꼽으라면, 결국 나를 데리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아닐까 하고.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말들 속을 지나간다. 누군가의 평가,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조언, 때로는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린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랬다. 남들의 말에 휩쓸렸고, 남들의 반응에 마음이 상했고, 어떤 날은 그 말들 때문에 하루 전체가 무너지기도 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인간은 원래 혼자보다 무리 속에서 살아갈 때 생존에 유리했던 존재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삶에는 어느 시점부터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더라도, 결국 내 삶의 중심은 내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말은 참고할 수 있다. 조언은 들을 수 있다. 비판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중심까지 내어주면 안 된다. 자신을 잃는 순간 사람은 쉽게 흔들린다. 남의 기대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인데도 내가 사는 것 같지 않은 날이 찾아온다. 그때의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돌아가는 부속품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오늘은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앉았는데, 막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들이 엉키고, 그러다 보니 또 잡다한 이야기들만 잔뜩 늘어놓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썼을 것이다. 내 감정이 이끄는 방향대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글쓰기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보다, 독자들이 무엇을 궁금해할지, 어떤 이야기에 멈춰 설지, 어떤 문장이 그들의 삶에 작은 파문이라도 만들 수 있을지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글쓰기가 전보다 어려워졌다. 예전보다 훨씬 더디고, 훨씬 더 오래 멈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어려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변화가 조금 반갑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썼다면, 지금은 닿아야 할 말을 고민한다. 예전에는 내 안을 쏟아내는 일이 글쓰기였다면, 지금은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는 일이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어렵지만, 그래서 더 깊어졌다고 믿고 싶다.
어차피 시간은 간다. 쓰지 않아도 가고, 망설여도 가고, 미뤄도 간다. 그렇다면 나는 계속 써보려 한다. 완벽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삶에서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여전히 가장 즐거운 일이고, 어쩌면 가장 오래 붙들고 싶은 기쁨이다.
잘 지내고 있다.
조금씩 더 단단해지려 하고,
조금씩 더 나를 잘 데리고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글쓰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