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문득 그런 날이 있다. 분명히 바쁘게 살아온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는지 잠시 멈춰 서서 묻게 되는 날 말이다. 해야 할 일은 늘 많고, 책임져야 할 것도 여전한데, 어느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묻는다. 지금 이 삶은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30대에는 앞만 보고 가면 되는 줄 알았다. 남들보다 늦지 않게, 가능하면 더 빨리,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믿었다. 쉬면 뒤처지는 것 같았고, 멈추면 도태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쉴 때조차 마음은 쉬지 못했다. 몸은 앉아 있어도 생각은 늘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에 쫓기는 사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알게 된다. 사람을 가장 지치게 만드는 것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 둘 곳 없이 살아가는 상태라는 것을. 할 일이 많은 날보다,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모르는 날이 더 힘들었다. 바쁜 것은 견딜 수 있어도 공허한 것은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삶에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괜히 더 크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삶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건, 어떤 계기, 어떤 극적인 전환점이 있어야 사람도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삶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별것 아닌 것들이 나를 조금씩 바꾸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한 번 더 여는 일, 마음이 어지러울 때 괜히 밖으로 나가 조금 걷는 일, 사람을 대할 때 한마디를 더 부드럽게 건네는 일, 하루를 마치며 짧게라도 생각을 적어보는 일. 그런 사소한 반복들이 쌓여 어느 날의 나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작은 것을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순간에도 잠시 멈춰 보려 한다.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갈 뜨는 순간, 누군가와 무심히 주고받은 짧은 안부, 해가 기울어가는 창밖의 빛, 일 끝나고 찾아오는 조용한 저녁의 공기 같은 것들. 어쩌면 삶은 원래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내가 너무 오래 큰 것만 바라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다.
행복도 어쩌면 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은 행복을 크고 선명한 것으로만 떠올린다. 그래서 자꾸만 아직 멀었다고 느낀다. 이것만 이루면 행복할 것 같고, 저기까지만 가면 편해질 것 같고, 조금만 더 가지면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쫓아가는 동안 지금 내 옆에 와 있는 작은 평온들은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린다. 행복은 도착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나가는 동안 계속 옆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어떤 날은 별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가라앉고, 누가 한 말 한마디가 오래 남아 하루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오는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벽하게 괜찮아지는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중심을 찾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한 사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린 뒤에도 자기 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삶을 오래 버티게 해주는 것도 결국 그런 힘일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힘이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힘이 아니라, 휘둘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시 나를 붙드는 힘. 감정이 없어서 단단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있어도 중심을 잃지 않는 힘. 나는 이제 그런 단단함이 진짜라고 믿는다.
요즘은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으려 한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더 빨라야 한다는 조급함, 더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런 마음은 불쑥 찾아온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마음들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잠깐 멈춰서 바라본다. 아, 또 조급해졌구나. 또 쓸데없이 나를 몰아세우고 있구나. 그렇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전보다 조금 덜 휘청거린다.
결국 삶은 나를 데리고 끝까지 가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가장 오래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도 나를 다루는 법일 것이다. 지치면 쉬게 하는 법, 흔들리면 붙잡아 주는 법, 불안하면 다그치기보다 기다려 주는 법.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가며 꼭 익혀야 할 삶의 기술 아닐까.
어차피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붙잡으려 해도 흐르고, 외면해도 흐르고, 망설이는 사이에도 흐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 시간 위에 조금 더 나은 생각을 올려두고 싶다.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조금 더 성실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조금 더 단단한 태도로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방향만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조용히 쌓이고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 하루는 분명 내 안에 남는다. 그래서 오늘을 함부로 보내고 싶지 않다. 대단하게 살지 못한 날이라도, 적어도 내 마음까지 놓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멋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잘 살고 싶다.
남들보다 크게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깊게.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 중심을 잃지 않은 채로.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글쓰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