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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서 터진 실오라기 소동

by 재윤

비 오는 초여름 아침이었다. 새벽부터 짐을 싸던 나는 낡은 캐리어 지퍼를 힘겹게 끌어올리고 마지막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망한 가게의 메뉴판과 세금 고지서. 삐뚤빼뚤 흩어진 종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리 안 된 건 못 본다’는 본능이 또 살금살금 올라왔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질끈 감고 현관을 나섰다.


현실 도피를 위해 미국행 비행기표까지 끊었으니, 우선 외국 운전면허증부터 받아야 했다. 고양시 경찰청 민원실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번호표 42번. 대기석에 앉자마자 시선이 자동으로 벽시계를 향했다. 1도쯤 기울어 있었다.


“저걸 바로잡아야 하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헛기침을 삼켜 버렸다. 그때, 발급 업무를 맡은 여경이 “신청서 작성 도와드릴게요”라며 다가왔다.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 반듯한 모자챙. 순간 마음이 놓였다.


“역시 공무원 제복은 티 안 나게 반듯해야지.”


서류를 제출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던 중,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바로 그 여경의 제복 가슴팍, 계급장 아래쪽에 하얀 실오라기 하나가 덜렁 매달려 있었다.


첫 번째 생각

‘저 실, 30도쯤 기울었네.’


두 번째 생각

‘근데 왜 하필 거기야?

어깨였으면 바로 떼 달라고 했을 텐데.’


세 번째 생각

‘모르는 사람이 가슴을 가리키면 오해받을 텐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폭주했다.

‘저기요, 여기…’


손가락을 들자마자 성추행범으로 몰려 수갑이 채워진다. 실오라기를 못 본 척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눈이 자꾸 그리로 간다. 결국 실오라기의 존재를 견디지 못해 힐끗거리다 CCTV에 잡혀 더 수상해진다.


“참자, 참자.”


마음을 눌러도 눈동자가 말을 안 들었다. 실오라기는 마치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치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고, 에어컨 바람이 지나치게 차갑게 느껴졌다.


결국 결심했다. ‘이렇게 신경 쓰느니 부딪히고 말자.’ 조심스레 창구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제복에 실 한 가닥이 붙어 있어서요. 혹시 불편하실까 봐...”


나는 손짓 대신 명찰 바로 아래쪽을 가리키며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여경은 살짝 놀란 듯 내려다보더니 “어머, 감사합니다!” 하고 순식간에 실오라기를 떼냈다.


그제야 숨이 풀렸다. 여경은 웃으며 “민원 보러 오신 분 중에 이렇게 섬세하게 챙겨 주신 건 처음이네요”라고 농담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제가 좀… 삐뚤어진 걸 못 참아서요”라고 답했다.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작지만 명확한 이해가 흘렀다. “예민하지만, 배려심에서 나온 행동이구나”라는 이해.


발급증을 받아 들고 민원실을 나서려는데 여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람들이 별거 아니라고 넘겨도 누군가에겐 크게 보일 수 있잖아요. 덕분에 감사하네요.” 내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실오라기 하나 떼줬을 뿐인데, 속이 이렇게 후련할 줄이야.


밖으로 나오자 빗줄기가 약해져 있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힘껏 쥐며 생각했다. 나는 실패로 무너진 삶을 ‘정렬’ 하기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엉킨 채무표, 뒤죽박죽 된 재무제표, 어긋난 팀워크. 모두가 제자리에서 삐끗했을 때,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에도 발을 동동 굴렀던 내가, 내 인생 잔해를 그대로 둘 리 없었다.


물론 이런 예민함이 항상 장점은 아니다. 누군가 물건을 툭 던져 놓으면 금세 정리하려 하고, 문이 덜 닫힌 채 덜컥거리면 뛰어가서 문고리를 돌린다. 그런 모습이 ‘강박’처럼 비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이것은 완벽주의가 아니라 ‘질서를 통해 안전을 찾으려는 본능’이다. 실패로 크게 흔들린 뒤, 나는 삐뚤어진 것에 예민해져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에게 학습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예민함을 더 건설적으로 쓴다. 매장의 동선이 어지러우면 “불편하지 않으세요?”라고 묻고, 메뉴판 글씨가 삐뚤면 디자이너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상대가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은 가급적 유머를 섞어 전한다. 덕분에 직원들은 “사장님 눈썰미 덕에 디테일이 살아난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삶은 언제나 뜻밖의 ‘실오라기’를 달고 나타난다. 그때마다 나는 세 가지를 자문한다. 첫째, 정말 지금 고쳐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는가? 둘째, 이 행동이 상대를 배려하는가, 내 강박을 푸는가? 셋째, 가장 품위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질문 덕분에 실오라기를 떼는 법도, 무너진 사업을 복구하는 법도 점점 세련돼 간다.


혹시 당신도 사소한 삐뚤어짐에 신경이 곤두서는가? 그건 성격 결함이 아니라 당신만의 레이더일 수 있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때론 용기로, 때론 유머로 바로잡아보라. 실오라기 하나 떼냈을 뿐인데 마음이 가벼워지듯, 삶의 작은 어긋남을 정리하는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글 쓰는 재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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