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낸 건 너 때문이 아닌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스스로 굉장히 좋은 엄마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매일 아이들을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니 말이다. 성대결절 진단을 받을 정도로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에 진심이었던 난 타칭까지는 몰라도, 자칭 좋은 엄마였다.
그런데 최근 일이 터졌다. 그날은 체력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날이었다. 평소 육아를 잘 도와주는 남편도 그날은 야간근무로 밤 10시나 돼야 퇴근한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두 아이를 챙기며 이른 육아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유독 첫째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30분만 TV를 보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도 끄지 않고 더 보겠다며 떼를 쓰고, 저녁상을 차려놓고 먹으라고 말했는데도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과자만 찾아먹다가 깨끗이 청소한 바닥에 과자를 다 쏟아버렸다. 그뿐만이랴 씻기러 가는 것도 세월아 네월아. 그 상황에서 재워달라고 보채는 둘째의 울음까지 더해지니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다.
둘째를 안고, 매서운 눈빛을 장착한 채 첫째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엄마말 안 들어! 양치를 꼼꼼히 해야지!" 하며 첫째 손에 든 칫솔을 뺏어 아이의 입에 욱여넣었다. 박박박,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빨리 양치를 끝내고 재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에게 양치컵을 주며 입을 헹구라고 했다. 강압적이고 무서운 엄마 모습에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우는 모습을 보자 '아차' 싶었다.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줬다. 울음이 그친 첫째는 저녁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배가 고프다며 시리얼을 먹고 싶다고 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시리얼에 우유를 넣어서 줬다. 그런데 갑자기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시리얼과 우유가 엎어져있었고, 첫째는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야!!"
하루 만에 2차 폭발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화를 내서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난 금세 또 잊고 화를 내고 있었다. 엄마의 고성에 첫째는 또 울었다. 우는 첫째를 달래며, 바닥에 엎어진 과자와 우유를 치웠다. 참으로 길고 긴 하루였다.
첫째까지 재우고나니 집에는 고요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내 마음속은 적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하는 반성과 회환이 밀려왔다. 말을 안 듣고, 떼를 쓰는 것. 먹다가 흘리기도 하고, 엎기도 하는 것. 아직 어린 아이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집 첫째긴 하지만 그 아이도 이제 4살 된 아기였다. 둘째가 그랬다면 내가 똑같이 화를 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난 첫째를 다 큰 아이로 생각하고 대한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첫째가 자고 있는 방에 갔다. 싱숭생숭한 엄마와 달리 첫째는 침대 시트에 볼을 비비며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아기 때 모습과 같았다. 엄마와 노는 걸 유독 좋아하는 아이인데, 동생이 생긴 뒤 혼자 TV 보는 시간이 길어진 우리 큰 아이... 이렇게 작고 귀한 아이에게 소리 지른 게 미안해서 첫째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볼에 몰래 뽀뽀를 한 채 방을 나왔다.
오늘 아이가 잘 못한 건 없었다. 굳이 잘 못 한 걸 꼽자면 그건 피곤한 내 몸뚱이였다.
좋은 엄마의 자질을 생각해 본다. 인내심이 강한 것, 아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 매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겨주는 것, 책을 읽어주는 것, 아이와 깊은 상호작용을 나누는 것, 아이가 필요할 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것 등 모든 자질이 우위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지만, 그중 단연은 바로 엄마의 체력이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에게 최고의 부모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행동을 쉬이 포용해주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정을 터트리며, 낮엔 화내고 밤에는 울며 반성하는 걸 반복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부모 안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데, 아이들에게 나눠줄 에너지가 어디 있겠는가.
체력을 키우기 위해 일단 잠을 자야겠다. 그리고 일어나서 밝은 얼굴로 아이들을 다시 안아줘야겠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만큼 내 몸을 챙기는 것.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불변의 진리,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