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해보겠습니다!"
그 호기로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메일함에는 '개발 가이드'라는 이름의 묵직한 벽돌 한 장이 도착했다. 이러닝 콘텐츠 개발의 첫걸음이자, 가장 거대한 장벽. 바로 '목차 구성'이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막연했다. '그래도 강의 경력이 18년인데, 주제만 정해지면 목차야 금방 잡겠지.' 하지만 가이드를 열어본 순간,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산산조각 났다.
"목차가... 30개라고요?“
이러닝 과정, 특히 사업주 훈련 과정은 엄격하다. 학습자가 일정 시간을 충실히 학습해야 환급이 되는 구조이다 보니,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한 촘촘한 설계가 필수다. 내가 평소에 하던 오프라인 강의처럼 "자, 오늘은 이 부분을 좀 더 깊게 봐볼까요?" 하며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예산과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내게 주어진 과제는 무려 30차시짜리 대형 과정이었다. 한 회차당 25분을 채워야 하니, 단순 계산으로도 750분(12.5시간) 분량의 목차를 짜내야 했다. 8개, 15개 정도의 소목차로 구성되는 가벼운 교양 강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막막했다. 흰 종이를 펼쳐놓고 제목들을 적어 내려갔지만, 10개를 채우기도 전에 밑천이 드러났다. '간호사를 대상으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식'이라는 주제는 너무 거대했고, 내 머릿속의 지식은 너무 파편적이었다.
"도대체 뭘로 이 빈칸을 다 채우지?"
그때의 기분은 마치 캄캄한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공포감. 그것은 말 그대로 '목차라는 지옥'이었다. 첫 이러닝은 혼자가 아닌 함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30개 목차 원고 집필 시간을 길게 받은 것이 아니었고, 혼자 할 자신이 없었기에 지인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도 모든 과정의 주체는 나였기에 전체 목차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반드시 내몫이다.
18년 차 강사의 짬에서 나온 치트키: '질문'에서 시작하라
밤새 흰 종이와 씨름하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지식'을 나열하려고만 하고 있구나. 학습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는 잊은 채 말이다.
방향을 틀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간호학, 기본간호학, 최신 임상 지침 등 전문 서적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2년 전, 아직 AI가 내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기 전이라, 오로지 책과 내 머리에 의존해야 했던 아날로그 작업이었다. 그리고 나는 책을 펼치기 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신규 간호사였을 때, 가장 두렵고 막막했던 순간은 언제였지?"
"선배에게 물어보기 눈치 보이지만, 꼭 알아야 하는 임상 팁은 무엇일까?"
"이론과 실제 현장의 가장 큰 괴리는 어디에서 생길까?“
이 질문들이 마중물이 되어 책 속의 지식들이 하나둘씩 목차라는 뼈대에 살로 붙기 시작했다. 학습자가 가장 궁금해 하고 필요로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목차를 구체화했다. 신규간호사 시절로 돌아가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은 간호사가 아닌 요양보호사 대상으로 하는 이러닝 개발이 메인이 되었지만 입장을 바꾸고, 개구리 올챙이 적을 생각했던 훈련은여전히 목차구성에서 도움이 된다.
관찰의 힘: 좋은 원고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달려있다
목차의 개수를 채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각 차시의 밀도였다. 25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로는 10분도 채우기 힘들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섬세한 관찰 능력' 이었다. 18년 동안 요양보호사를 양성하며 학습자들의 눈빛과 표정, 질문의 내용을 관찰해온 경험이 빛을 발했다.
이 부분에서는 학습자들이 어려워해서 표정이 굳어지겠구나. 그렇다면 예시를 더 풍성하게 넣어야겠어. 이 내용은 이론은 알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해 하겠구나. 그렇다면 '현장의 소리' 세션을 넣자.
단순 지식의 나열이 아닌, 학습자의 역량 강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관찰했다. 그 고민의 흔적들이 원고 곳곳에 스며들며, 비로소 30차시라는 방대한 미로를 탈출할 수 있는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지옥을 탈출한 당신에게, 축하를
목차를 완성했다는 것은, 이러닝 이라는 거대한 건물의 설계도를 완성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원고라는 벽돌을 쌓고, 촬영이라는 인테리어를 해야 한다.
여전히 앞길은 멀고 험난하다. 하지만 가장 막막했던 첫 번째 고개, 목차라는 지옥을 탈출한 당신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당신은 이미 이 서바이벌의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
자, 이제 이 설계도를 들고 본격적인 공사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다음 화에서는 한글 7장의 압박, 그 밀도 있는 원고 작성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