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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Aug 30. 2024

무슨 일을 하든 좋은 기억이 되어 줄 거야.

“당신은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자신감이 많은 거야?”


신랑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런데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겁도 있고, 뛰어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러닝 학습 개발을 제안한 메일에 대처하는 나의 태도를 보고 물어왔던 질문이다. 이러닝 제안은 처음이 아니다. 현재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병원동행매니저 양성 강의의 제안도 받았으나 교육원과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세 번의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 제안, 이력을 보고 다시 제안한 두번째


이번 제안은 그 거절의 아쉬움을 달래 줄 만한 제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선뜻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간호사보다는 강사로 살아온 시간이 몇 배가 되는데 이러닝의 주제가 간호 실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래전 겪었던 간호실무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마음이 늘어날 수 있기에 짧은 고민을 하기로 했다. 담당자에게 하루의 시간을 달라는 요청을 했고, 약속된 시간 후에 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30강의 원고 300페이지가량을 작성해야 하고 강의 촬영만 5일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혼자 모든 원고를 감당하기 어려워 SNS에서 소통하고 있는 간호사 강사님에게 협력하자는 제안을 드렸다.   

  

조만간 미팅이 예정되어 있다. 결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열정이 더 생긴다. 보내주신 목차에 추가나 변경이 필요한 부분을 검토하며 전반적인 과정을 그려보고 있다. 간호의 중심도 사람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다 해도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내가 가장 애정하는 휴머니튜드다.     


이 내용을 기반으로 모든 과정들을 풀어간다.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문득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는데 임상간호 매뉴얼이다.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만큼 가격도 꽤 비싼 편이다. (2000년 당시) 이 책을 창고에서 꺼내다 보니 아주 오래전 추억과 재회했다.     


내 저서인 [나는 강의하는 간호사입니다.]에 임상간호매뉴얼과 연관된 한 자락의 사연이 있다. 출판사에서 특정 교재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의견이 있어 따로 기입하지는 않았다.  그 사연을 잠시 남겨보고자 한다.


간호 대학생 시절은 내 인생 가장 가난했던 한 때로 기억한다. 점심을 먹을 돈이 없어 굶었던 날이 대부분이다. 학교 식당의 급식 메뉴가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이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강의실을 가장 먼저 나오는 학생이기도 했다. 밥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받기 전에 빠르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비가 없어 한 정거장은 걸어 다녀야 하는 수고로움은 기본이고(환승이 없던 시절) 아르바이트 비용의 가불 없이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이런 가난함 속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던 나에게 필수 도서가 아닌 참고서는 사치의 영역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간호 대학생은 병원실습을 할 때 케이스 스터디라고 해서 환자에 대한 간호사정과 중재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 임상간호매뉴얼이다.     


과제를 할 때마다 친구들에게 빌려보기 위한 전략을 세우느라 바빴다. 다행히 그 전략이 많은 도움이 되어  리포트 누락 없이 간호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종합 병원에 취직을 하고 첫 월급을 받은 날 임상간호매뉴얼 책을 구입했다. 간호사 일을 하며 꼭 필요한 도서는 아니었으나 학생 시절의 아픔을 조금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사할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애착 물건이 되어 있다. 2000년 3월, 간호대학 1학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이러닝을 준비하려고 한다.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간호를 하고 싶었던 때가 바로 그때다.    


물론 내 이러닝 교육을 듣는 수강생들은 간호학생이 아니다. 이미 간호사 면허증을 소지하고 임상(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경력자가 대부분의 수강생이 될 것이다. 병원평가를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직무교육이다.   

   

이 교육을 대하는 수강생들의 특징이 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앉아서 모니터 속의 강사와 아이 컨텍을 하며 듣는 수강생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채우기 위한 비자발적 참여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며 듣더라도 귀가 아닌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이나 목소리의 지점은 있다. 그때가 모니터 속 강사와 아이 컨텍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한 순간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 순간 덕분에 나를 돌아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개발하고자 하는 이러닝의 최종 목표이다.   


 그동안 겪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 두려움이 걱정이 되어 생각과 기분을 흔들어 대기도 한다. 이번 제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하려고 한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단언할 수 없어도 일은 시작하겠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좋은 기억이 된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할 일이 보인다. 그것이 기쁨일 때 사물에서 빛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위대한 대화> 김지수  미나가와 아키라 편               


이러닝 학습 개발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순간 다시 피어오르는 열정의 꽃 봉오리를 볼 수 있었고, 자료 수집을 위한 발걸음은 20년 전의 추억이 담긴 도서를 만나게도 해주었다.   


이 과제의 마침표가 찍히는 날까지  어떤 좋은 기억들과 함께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감사로 반갑게 맞이할 준비는 하고 있다. 이렇게 글에 담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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