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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야 Oct 31. 2024

아프니깐 청춘이다

"아프니깐 청춘이다?" 내 생각엔...


뭐든 열심히 살고자 했다. 독립하지 않았을 당시에도 퇴근 후 운동을 다니며, 집에선 새벽 두 시까지 자기계발을 했다. 그런 아이가 첫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큰 이동수라고 할 수 있겠다.

 

8월 첫 자취를 시작하고 월세와 관리비 그리고 각종 공과금을 매달 내야 하는 퀘스트 속에서 살아 나가야 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자취를 시작한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게 남은 돈은 단돈 1천만 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하겠다고 했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와 그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 시점부터 나의 처절하고 찌질한 삶이 시작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에 삶이 점점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모든 일이 풀리지 않게 되었다. 회사와 알바 그리고 프리랜서를 모두 포함하여 총 100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단 한 곳 외의 프리랜서 일을 제외하곤 모조리 떨어지게 되었다. 그 전 회사에서 인정받고 팀장으로 근무했던 탓인지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월세와 공과금은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해당 업체에서 수당 없이 추가 근무를 시켜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치며 점심시간도 패스하고 주말까지 반납한 채 잘리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업체 측 사정으로, 결국 반년 후 업무가 종료되었다.)




그 당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말한 문장들이 몇 가지 있다.

“잠은 왜 자?”
“밥은 왜 먹어?”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자기 비하를 하며 일을 하는 타입이었지만, 그 당시 이렇게 정신을 잡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만 같았다. 프리랜서 일을 하던 중 포차 알바를 구하게 되었다. 늦으면 새벽 1시까지 하루, 총 6시간을 매일 근무했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씻고 자리에 앉아, 블로그 와 유튜브 등 또 다른 자기계발을 했다. 그러다 보니 평균 수면시간이 적게는 2시간 많게는 4시간이었다.


밥이라도 잘 챙겨 먹었어야 했지만, 돈을 아낄 수 있는 곳이라곤 식비밖에 없었다. 컵라면 하나를 한 끼로 먹는 게 아까워 면을 먹고, 다음 날 국물에 밥을 말아 총 2끼를 해결했다.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한 날에는 치킨너겟 두 개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하루 끼니를 해결했다.


그 모습을 나마저도 가여워하게 되면 정말 사실이 돼버릴까 봐. 애써 부정하며 웃고 다녔던 것 같다. 한 번은 친구 생일 기념으로 전화를 걸어 축하를 해주고 오랜만에 근황을 얘기하던 중 돈이 부족해서 밥을 잘 못 챙겨 먹고 있다는 이야길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곤 치킨 기프티콘을 오히려 내게 선물해 줬다. 나는 웃으며 잘 먹겠다고, 고맙다 말했지만, 통화가 종료된 후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잊지 못한다. 그날 먹은 치킨의 맛을.





하루는 마우스와 키보드로 작업을 많이 한 탓에 갑자기 오른손 검지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병원에 바로 달려 갔겠지만, 그 당시 키우던 강아지가 목에 경련이 일어나 동물병원을 데려가기 바빠 내 검지는 손가락 부목으로 대체하며 나을 거라 방치했다. 강아지는 완치를 했고, 나는 아예 손가락을 굽힐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병원에 방문했다.


다행히 보험 처리가 되는 항목이었기에 치료를 받고 다시 병원에 방문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집에서도 재활 운동을 하고있다.




그렇게 평균 2시간 취침 하루 1끼 또는 거르기를 반복하자 결국 사달이 났다.

중학생 때 바라던 나의 목표 체중에 -7킬로가 빠졌고. 저체중으로 계단 하나를 오르기조차 힘들어졌다.


평소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하길 좋아했는데 이날도 역시 데이식스 노래를 틀어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노래가 갑자기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템포가 느려졌다, 빨라졌다. 멜로디라인이 아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썩어들어가는 모양으로 환각과 환시가 동시에 벌어졌다. 너무 무서웠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들려는 순간,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핸드폰에 다이얼 버튼조차 조준이 안 됐다. 손에서 시작된 경련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졌고 앞으로 걸어가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목 근육이 제어되지 않는 수준이 되자 목소리 자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가 집에 방문해 나를 실어 본가로 데려갔다.     

그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모든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한 달을 먹고 싶은 걸 모조리 먹으며 살찌우기에 돌입했다. 위가 작아진 상태라 소화제를 먹으며 열심히 위를 늘려나갔다.

    

한 달간의 요양 끝에 죽다 살아난 나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게는 특이점이 하나 있는데, 한 번 질병으로 얻게 된 것은 완치되지 않고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아직도 식사를 거르면 손을 심하게 떤다. 손 떨리는 걸 육안으로 확인하는 순간 살기 위해 뭐라도 집어 먹는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 건강하지만, 지갑 사정은 아직 그닥이다.

근검절약하며, 전보다 몸 건강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아픈 일은 이야기의 소재로 쓰기 좋은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것만이 고통의 장점이자 경험이다.


"아프니깐 청춘이다?" 내 생각엔, 우리는 언제나 청춘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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