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내 삶의 속도를 처음으로 의심했다.
그날따라 신호등이 이상하게 느리게 바뀌었다.
빨간불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내 발끝은 바닥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출근길도 아니었고,
누군가와의 약속에 늦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하루,
평범한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시계를 확인하고, 신호등을 노려보며,
왜 이렇게 안 바뀌냐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도로를 건너가는 차들을 바라보다가,
묘한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이렇게 서둘러야만 했을까?”
돌아보면 나는 늘 서두르는 사람이었다.
다음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쫓고,
남보다 한 걸음 앞서기 위해 달렸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모든 걸 잃을 것 같았고,
속도가 느려지는 건
곧 무능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붙잡았고,
가지 않아도 될 길을 만들었다.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고,
속도를 내야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 이 신호등 앞에서 나는
이유를 잃은 채 서 있었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오래전부터
내 안은 멈춰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몰랐을 뿐이다.
삶은 가끔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우리를 멈춰 세운다.
몸이 무겁거나,
관계가 뜻하지 않게 멀어지거나,
더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그때 우리는 멈춤을
‘외부의 사건’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마음속에서 깜빡이던 신호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말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서 있을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초록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지만,
예전보다 훨씬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급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조금 더 길어져도 괜찮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멈춰 선다.
사람들의 흐름에서
살짝 벗어나 숨을 고르고,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것은 후회도 아니고, 회피도 아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속도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이제는 안다.
멈춤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내게 건네는 가장 진지한 질문이다.
“이대로 달려도 괜찮니?”
“네가 원하는 건 정말 저기야?”
나는 그 질문 앞에 서서
처음으로 내 속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신호등 앞에서,
내 삶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빨간불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그 시간 동안 세상은 멈추지 않지만,
나는 멈춰서 나를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