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은신 Oct 07. 2023

소설 <이마고imago>

타인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FM 라디오에 흐르는 아나운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난 밤 숙면하지 못한 무거운 머리를 한결 맑게 합니다. 출근길, 차창을 다 열어 가로수 초록 잎을 흔들고 날아온 바람을 가슴 가득 마셔 봅니다. 당신이 보낸 바람일까요. 그저께처럼 어젯밤 꿈도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가없는 푸른 하늘 높이, 가로놓인 사다리 위를 아슬아슬 넘나들다 새벽녘 잠에서 깨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공포와 떨리는 손으로 사다리를 잡은 채 내려다본 세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공간이었습니다. 까마득한 심연 그 아래 어디, 친구들이 사는 땅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 왜? 왜? 잠이 깨서도 쉬이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되뇌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서늘한 심장을 안고 간헐적인 새벽꿈에 시달리는지를. 내 영혼의 어디쯤 평안이 온전히 스며들지 못해 부유해 다니는지를. 까닭 몰라 그저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가만히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애써 오직 당신의 사랑에만 집중하려 마음을 모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과다한 일과 과로한 육체로 지치고 피곤했을 뿐이겠지요. 하루가, 새로운 하루가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내겐 모두 당신의 은총입니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태초의 것처럼 맑고 순결합니다. 혼돈과 공허를 비추는 태초의 빛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늘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게 온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어떻게 감히 작은 상흔이 내 삶 전체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 봄바람이 참 상쾌합니다. 그래요, 평안하지 못했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요. 이미 내게 모든 것을 주신 당신, 당신 자신마저 내게 내어준 당신, 오늘도 그런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리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나운서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르며 급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FM 볼륨을 줄이자 통화버튼 너머로 급박하게 들려오는 송 선생의 목소리. 

「팀장님! 빨리 오셔야겠어요. 학부모가 센터 문도 열기 전에 들이닥쳐서는 무조건 빨리 팀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어요. 조금 기다리시라 해도 도무지 말을 안 들어요.」 

「거의 다 왔어요. 먼저 접수면접 간단히 해주세요.」

 그제 S중학교로부터 의뢰받은 학생 ‘유’의 아버지임이 분명하다. 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학교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담임교사를 협박했다던 남자. 낮술에 취한 채 학교를 급습해 욕을 해대는 그에게, 담임교사는 학교폭력위기대응메뉴얼에 따라 교육청과 MOU를 맺은 우리 센터를 소개하면서, 그곳에 가면 유의 마음이 힐링되고 닫혀버린 생각도 변화될 수 있을 거라 설득했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은 센터에 우울증조차 단번에 치유할 수 있는 당의정이라도 있는 듯, 가정과 학교가 감당하기 힘든 아이들을 떠넘기듯 의뢰하고는 이른 시간 내에 완치와 변화를 요구했다. 꽤 오래 상담을 진행해도 왜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지, 도무지 명쾌한 변화가 없는지 너무도 빨리 의아해했다. 부모도 교사도 아이들로 인한 그들의 만연한 스트레스를 상처의 마지막 종착지인 상담센터에서 풀려고 했다. 더 이상 아이들을 보낼 곳이 없는 그들은 센터에 기대가 높은 만큼 분노도 컸다.

 오늘은 유가 아버지와 함께 와서 첫 상담을 받기로 약속된 날. SNS 상에서 전교생의 질타와 멸시를 받고는 충격에 빠져 학교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라 했다. 아마 유의 아버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몇 회기의 상담에도 불구하고 쉽게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유의 행동을 다짜고짜 상담자인 나에게 따지고들 것이다. 

 이제 곧 센터에 도착해 유를 만나고, 오전 중으로 팀원들이 모여 사례회의를 한 후 상담방향을 잡고, 오후엔 자녀들의 우울 개입을 위한 학부모세미나에 참여해 집단과 우울을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다. 현실의 하루 스케줄을 더듬는 마음의 길, 그 어느 언저리에서 자동인형처럼 다시 무거워져오는 머리. 애써 감아둔 태엽이 다 풀리는 시간이면 다시 반복되는 두통.

 다시 FM 볼륨을 한껏 높이자 마침 흘러나오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벚꽃엔딩. 귀보다 심장이 먼저 듣고 불안하게 뛰기 시작한다.

「아! 안 돼. 안 돼. 이 노래는 제발……」      

  이 노래는……, 벚꽃엔딩은……, 달콤하고 행복한 노래입니다. 연인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아래를 거닐며 흥겨운 봄날에 취해 고조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합니다.

♬ 봄바람 휘날리며/ 떨어지는 벚꽃 잎이/ 출렁이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 

 그런데 내겐 이 노래가 왜 힘들고 아픈지 알 수 없습니다. 매년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이 고통은 시작됩니다. 벚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고,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러, 한 번의 비에 흩날려 떠나버릴 뿐인데, 그 짧은 며칠의 하루하루가 내겐 큰 형벌과도 같습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노래일 뿐, 결코 그 시詩가 아닌데 왜 이리도 심장이 아플까요. 아픕니다. 정말 아픕니다. 벚꽃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일이 내겐 심장을 파는 통증으로 다가옵니다. 그때, 그 시詩 속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의 시구詩句는 마치 떨어져 날리는 벚꽃을 보는 듯 했습니다. 내게 그것은 슬픈 죽음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름날 녹음綠陰을 이루고 가을날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봄날의 낙화落花는 위장된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요, 떨어지는 꽃잎은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성숙을 위한 아름다운 연단이라 믿었습니다. 그 누가 떨어지는 벚꽃 아래서 슬퍼할 수 있을까요. 봄날의 분홍빛 꽃비를 맞으며 연인끼리 가족끼리 환하게 웃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고독의 옷을 입고 홀로 천천히 꽃비 아래를 걷는다 해도 그건 슬픔이 아니라 낭만일 테지요. 그런데…… 이제 그 시詩도 아니, 그 시를 낭송하면 저절로 떠오르곤 하던 노래 벚꽃엔딩 마저도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아니겠지만, 정말 아니겠지만, 만약 만분의 일이라도 그들의 말이 옳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오직 ‘희’를 살리려 했을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소생한 영혼으로 서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 열매 맺을 수 있을 거란 소망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숨이 막혀옵니다. 제발 괜찮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결코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말해줄 수 있니? 학교에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SNS 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라포가 생략된 첫 상담의 어색한 탐색. 선뜻 대답하길 지체하며 상담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유의 얼굴이 말갛다. 이 아이의 어디에 등교를 거부할 만큼 사무친 아픔이 숨어있는 걸까. 커다란 눈과 가녀린 몸피로는 넘치는 아픔을 채 담을 수 없을 듯하다. 외양만으로도 충분히 아픔이 감지되는 유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일이 현재로선 최선의 라포다. 

「가지 않는 게 아니라 갈 수가 없어요. 난 이미…… 모든 아이들에게 걸레가 되어 있거든요. 걸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아이들을 내 힘으로 바꿀 순 없잖아요」

 순식간에 눈 속에 그렁그렁 맺혀버린 눈물이 뚝! 말간 뺨 위로 떨어져 내린다. 내밀하게 숨겨뒀던 마음을 입으로 내보이자말자 서러움이 솟아오르는 모양이다. 뭔가 목에 걸리는지 자꾸 마른 침을 삼킨다.

「바꿀 수 없다고 미리 결정하지 말고 이제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 그러려고 유가 여기까지 온 거니까」

 물론 바꿀 수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누가 섣부른 아이들의 뇌리에 각인된 지독한 편견과 선입견을 쉬이 바꿀 수 있겠는가. 

 유의 눈물 한 방울로 부쩍 가까워져버린 심리적 거리가 부담스럽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내 남자친구 진우는 참 불쌍한 아이예요. 엄마는 어릴 때 가출했고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산대요. 일주일 전에도 아빠가 술 먹고 때려서 집을 나왔다고 밤에 톡을 보내왔어요. 학원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남자친구가 너무 가엾어서 그냥 집에 못가고 만나서 위로해줬어요. 엄마한테는 친구 집에서 잔다고 하고요. 밤새 같이 있으면서, 저녁밥을 못 먹은 것 같아 삼각 김밥이랑 떡볶이도 사서 먹이고 한참 속상한 얘기도 들어주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둘 다 새벽에 너무 잠이 와서 근처 병원 로비 의자에서 잠깐 같이 쪼그려 잤을 뿐이에요」

 담담하게 그날을 술회하는 유. 아이의 표정에 전혀 거짓이 없다. 이건 오랜 경험으로 예민해진 상담자의 더듬이가 포착한 정확한 직관이다.

「다음 날도 진우가 톡을 보내왔어요. 너랑 같이 지낸 밤이 너무 따뜻하고 행복했다고요. 그런데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가 내가 화장실 간 사이 폰에 있는 톡을 보고는 나랑 진우가 섹스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몇몇 애들에게 소문을 낸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한 아이가 ‘유가 남자친구 진우랑 섹스했다. 그 둘은 매일 섹스하고 다닌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어요. 그 글이 이틀 동안 올라 있었지만 난 아무 것도 몰랐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러운 걸레라고 비난하는 댓글이 수천 개가 달렸어요. 그런데도 난 바보처럼 웃고 다녔던 거예요. 진우가 말해줘서 열어봤을 때 이미 나는 학교 애들 모두에게 함부로 몸 굴리고 다니는 더러운 걸레가 되어 있었어요.」

 한심하다. 화가 난다. 유가 바보 같다.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 같다. 왜 학교와 아이들을 피해 도망 오듯 이곳에 와서 나약한 눈물을 흘리는 걸까. 나는 걸레가 아니라고 악을 쓰며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밝혔어야 했다. 결코 아니라고, 죽어도 아니라고.      

 나는 결코 아니라고 밝힐 수 없었습니다. 아니란 말이 사람들에게 흘러간 순간, 그 말은 비겁한 변명이 되어 퍼져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죽인 사람으로 모자라 당돌하게도 자기방어 하는 사람마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아이, ‘희’는 전날까지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함께 집단상담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희는 몇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왔고 이미 몇 번의 자살 시도 경험도 있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했습니다. 마음 한켠 부담스러웠지만, 함께 의뢰된 위기가정의 아이들처럼 희도 당신이 내게 보낸 아이라 믿었습니다. 하여, 부담을 누른 채 다른 아이들과 함께 희도 상담의 일원으로 만났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폭력적인 아버지와는 단단히 벽을 쌓고, 학대받아 무기력한 엄마에겐 슬픈 연민을 쏟아내고, 불화한 부모 사이에서 불안으로 밤을 새며, 친구들의 따돌림에 고뇌하던 희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워서, 엄마는 가여워서, 친구들은 믿을 수 없어서, 분노를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온 듯했습니다. 깊은 무의식에 꽉 들어차서는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어 터져버릴 것 같은 희의 분노를 만져주고 싶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렇게 토닥이고 싶었습니다. 사례회의에선 위기가정의 아이들에게 시詩 상담으로 용기를 주자는 팀원의 의견이 공감을 얻었습니다. 서정과 함축의 시가 가정적 문제로 상처 입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리라 믿으면서도 마음 한켠, 우울한 희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모아진 팀원들의 뜻이었고, 시詩 상담을 해보자는 사례회의 결과를 누구보다 희가 반가워했습니다. 희는 환경으로 인해 힘들 때마다 시를 읽는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희가 시를 싫어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결코 시詩가 사람의 우울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온전한 구원은 당신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로 인해 잠깐이나마 짙은 우울이 희석되길 소망했습니다. 상담 회기마다 계절과 어울리는 시를 낭송하고, 감상하고, 느낌을 나누면서 상처 입은 내면을 순화하기로 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실수였을까요. 정말 그랬을까요. 

 첫 회기, 우리는 정호승 시인의 맑은 시를 읽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시를 읽으며 지금 아이들을 덮고 있는 그늘도 언젠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다음 회기, 안도현 시인의 따뜻한 시도 감상했습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오늘의 고통을 통해 아이들도 후일엔 상처로 잠 못 드는 이에게 따스한 편지가 되는 삶을 살리란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원택 시인의 시도 낭송했습니다. 봄날이 그리운 것은…… 곧 다가올 봄을 기대하면서 지금 아이들이 겪고 있는 내면적 추위도 언젠가 따뜻하게 녹을 것을 믿었습니다. 나와 희, 그리고 아이들, 우리는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감상한 시를 음미하듯 다시 톡에 올리기도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특별히 희의 즐거운 톡과 표정의 변화는 센터의 팀원들에게도 기쁨이 되었습니다. 팀원들도 집단상담에서 나눈 시를 SNS에 올리며 잃어버린 시심을 떠올리곤 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마음을 너무 놓아버렸을까요. 희의 내면에 말하지 않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날 밤, 그 아이를 옥죈 또 다른 일이 있었을까요. 모두 아니라면 정말 시詩 때문일까요. 그날 우리는 이형기 시인의 아름다운 시 낙화를 감상하고 나눴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마침 세상은 하롱하롱 떨어지는 벚꽃의 꽃비로 가득한 계절이었습니다. 노래 벚꽃엔딩이 FM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봄비처럼 떨어지는 꽃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여름날의 녹음과 가을날의 열매를 맺기 위한 낙화라면 아이들이 지금 극복하려는 상처도 분명 성장과 성숙을 위한 연단이자 밑거름임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시를 읽고 난 후,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백배의 결실을 맺듯 아이들의 상처도 많은 사람을 품는 사랑으로 승화할 것을 나눴습니다. 그저 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봄날의 나눔으로 인해 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망쳐야 했습니다.


 아이들로부터 도망쳐온 유 앞에서 끝까지 상담자의 자세를 잃으면 안 된다. 나약하게 얄팍한 심리적 연상 따위에 걸려들지 말자. 유는 내가 아니라 유 자신일 뿐이다.

「이미 걸레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너의 심정은 어땠어?」

「어땠을 것 같아요?」

 유의 얼굴에 순간 차가운 조소가 스쳐지나간다.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가해한 아이들을 향한 것인지 언뜻 구분이 안 된다.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 짐짓 냉담한 체하는 나의 눈이 유 앞에서 흔들리고 만 것일까. 유는 오늘 처음 만난 나의 두려움을 기어코 눈치채고 만 것일까. 당신이 모른다면 누가 알아. 유의 눈이 나의 숨겨둔 무의식을 훔쳐보는 듯하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머리가 다시 아파온다. 애써 감아놓은 태엽이 또 풀렸나보다.

「만약 나를 학교로 보낸다면 죽어버릴 거예요.」

 조소 끝에 일침을 가하는 유. 그래, 넌 남이 싼 똥을 제 똥이라 여기며 온 몸에 묻히고서 부끄러움에 얼굴만 가리기 바쁜 바보천치구나. 유의 소극성과 연약함에 서서히 분노가 일어난다. 단단한 억압의 기제로 자신을 방어하고서 현실을 직면하길 부정하는 유. 바보다. 정말 바보다.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될까? 날마다 섹스하다 걸려서 욕 실컷 먹고 죽은 아이가 되고 싶니? 얼굴 가리고 숨어있으면 세상이 알아줄까?」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내 말보다 자기들의 상상을 더 믿는다구요」

 유의 얼굴에 쓰디쓴 분노가 훑고 지나간다. 참담한 상처 밑에 가만히 웅크린 분노가 절제하지 못한 상담자의 공격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 그렇겠지. 널 미워했던 친구에겐 핸드폰 속의 글귀가 널 넘어뜨릴 좋은 구실이 되어준 거야. 그 구실은 일인一人의 희구적 상상으로 시작해서, 다수의 추측으로 변모되고, 곧 집단의 확신으로 진화했겠지. 넌 너무도 쉽게 그 애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만 분노의 희생양인 거야.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이러면 안 된다. 정말 이러면 안 된다. 나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애들이 더러운 나와 학교생활 같이 할 수 없으니 어디로든 사라져버리라고 했어요. 그래도 한 마디 변명 못했어요. 어쨌든 내가 남자친구랑 함께 밤을 보낸 건 맞잖아요.」

 성역을 이탈하여 다시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탕자처럼 불안해 보이는 유. 어차피 세상은 동기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오직 결과만으로 판단하고 결과가 나쁘면 동기조차 오염되고 만다. 남학생과 함께 밤을 새운 일에 남자친구의 아픔이나 유가 주려고 했던 위로 따윈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유는 그냥 남학생과 밤을 보낸 더러운 여자애일 뿐이다. 

「그 아이들이 SNS에 달아놓은 악성댓글이 자꾸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아요. 이젠 진짜 걸레가 된 느낌이에요. 아빠가 무서워서 등교하고 싶어도 학교는 더 끔찍하게 무서워요. 차라리 아빠에게 맞아 죽는 게 나아요.」

 습관처럼 손톱을 입에 물고 불안에 떨며 말하는 유. 이성을 제치고 절제를 벗어던진 상담자의 역전이감정이 불쑥 성급하게 입을 열고 만다.

「죽는다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그 비통함을 네가 아니?」     

 희가 죽은 다음 날, 아침에 걸려온 전화는 삶을 온통 비통한 눈물로 채웠습니다. 희는 전날, 저녁 내내 우울해했고 집에서 한밤중 목을 맸다고 했습니다. 두 달째 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해오던 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깨지 못할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꿈같은 현실에서 그렇게 희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례회의에 참여했던 한 팀원이 만나자 했습니다. 앞에 앉은 그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요. 희가 죽은 건 시詩 상담이 연유이며 무엇보다 낙화를 선정한 탓이라는 소문이 이미 모든 상담센터에 다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 시작은 우리 센터의 다른 팀 일원에게서 나왔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낙화의 시어들이 희의 죽음을 부추겼을 것이라는 일원의 성토는 소문을 타고 사실이 되어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담센터와 모든 상담자에게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확산되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이 배우는 국어교과서에 실린 건강한 그 시가, 죽음을 부를 리 없다고 반문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죽음을 부르는 시라면 우울한 아이들이 섞여있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나를 지배한 건 오직 충격과 끝 모를 두려움이었습니다. 정신을 놓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밤새 고통으로 절절한 가슴을 안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비명을 삼킬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실어증 환자가 되어 가슴에 가득한 말이 입에서 조음되지 못하고 낱낱이 부서졌습니다. 입을 닫은 채 터져버릴 듯한 가슴을 억압하면서 죽은 듯 숨죽여 엎드렸습니다. 사람, 그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당신 앞에서만 울었습니다. 그 모든 끔찍한 일들과 비밀스런 말들을 오직 당신 앞에서만 눈물로 말했습니다. 당신 앞에 앉으면 혀가 언어를 만들어내기 전 눈물부터 흘렀습니다. 그 일에 관해 분명하게 묻는 이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희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낙화는 어떤 의미로 선정했고 어떻게 나누었냐고 진솔하게 물었더라면 아파도 답했을 것입니다. 나는 희를 돕고 싶었고, 사례회의와 그 아이의 뜻에 따라 시詩 상담을 해왔고, 다른 시들처럼 낙화도 그 아이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 믿었다고. 상담방향과 시 선정이 부족했을지언정 결코 그 아이에게 낙담을 주려한 건 아니라고 눈물을 삼키며 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 관련자 모임에서 사람들은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거나, 뒤로 수군대거나, 눈을 맞추지 않고 외면하면서 우회적으로 비난했지요. 나는 공공연히 상담 계에 오명을 씌운 자, 한 아이를 죽여 놓고도 줄곤 상담 계를 떠나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확신으로 굳어진 수많은 말들이 공중을 떠다녔지만 그 중 어느 한 마디 말도 붙잡아 직시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 속에서 점점 단단해지는 말을 집어 녹여보면 결국, 살인이라는 섬뜩한 단어만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 단어를 대면하는 순간, 그 자리에 박제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은 떠나지 못하고 그들 속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들에게서 도망쳤지만 몸마저 떠나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영혼의 피를 흘리면서도 몸이 떠나지 못한 건, 당신이 나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걸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당신을 어느 날 섬광처럼 알아보았듯 그들도 언젠가 나의 진실함을 알게 되리란 소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안은 채 떠나버리면 영혼의 몰락자로 영원히 각인되어 치유되지 못할 예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여전히 처음 만난 아이들을 향해 웃고, 여전히 센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여전히 사례회의를 하며 지냈습니다. 피를 뚝뚝 흘리며 일상을 꾸역꾸역 채워갔습니다. 어떤 이는, 웃으며 상담 일정을 소화하는 내게서 덧씌어진 가면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얼굴 뒤에 숨어있는 슬픔의 내면은 보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때론 불꽃같은 눈으로, 때론 냉소적인 입술로 내게 무언의 질책을 보냈습니다. 어떤 이는 나의 얼굴 앞에서 악의적으로 희의 이름을 부르거나 자살을 화제로 올렸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온몸으로 쏟아내는 기운이 당신은 살인자라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말로 완성되지 못한 소리들이 산화되면서 내 속에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내면의 소리들은 말이 되고 싶어 순간순간 몸부림쳤지만 이내 산산조각 흩어져버렸습니다. 심장을 후비듯 아팠지만 벙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여름,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 오슬로에서 뭉크의 그림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밤이 되어도 백야로 인해 정오처럼 환한 북구의 땅, 그곳에서 바라본 뭉크의 작품은 너무나 어둡고 스산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나를 연이어 병으로 잃고 피해의식과 굶주린 모성에 떨었던 그의 유년을 말해주듯 불안과 공포, 죽음에 대한 절규가 작품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 그의 자아일 것이 분명한 인물들과, 인물들을 둘러싼 배경조차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땅의 백야는 짙은 어둠을 잠깐 숨겨둔 신기루였을까요. 캔버스 위에서는 파리한 봄빛이 곧 스러질 듯 위태로운 평안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그 땅의 백야만큼이나 불안해 보였습니다. 지구 북단의 백야는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겨 열한 시가 다 되어도 대낮처럼 밝았지만, 이제 곧 찾아올 흑야에 대한 두려움이 감지되었습니다. 겨울이면 빛 없이 온통 밤이 계속되는 흑야로 덮인다는 그 땅. 희가 죽고 낙화가 나를 엄습할 때 뭉크의 그림과 그가 살았던 북단의 백야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백야의 신기루가 사라지고 곧 오고야 말 흑야가 나를 기다리는 듯 두려웠습니다. 잊고 지내던 뭉크의 그림이 그때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제야 그의 그림을 가슴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슬프게도…… 한꺼번에 피고 떨어지는 벚꽃은 내게 집단의 광기와도 같은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그건 집단의 폭력이야. 그 애들이 SNS에 올린 저격 글과 댓글은 모두 캡처해 놓았지? 학교에서 폭력대책위원회를 열어서 사이버폭력에 대처하자. 무서워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넌 결백을 밝히지도 못하고 아이들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 거야」

 깜작 놀란 유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를 바라본다. 이런 상담자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감정적으로 치닫는 전개에 황당함으로 표정이 멍해진다. 상담자가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고 있다. 첫 만남에선 유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아이가 걷는 길을 옆에서 함께 걸어주면 되는데, 지금 난 유의 멱살을 잡고 앞서서 억지로 끌고 가고 있다. 이건 상담이 아니라 감정적 채근이다. 그래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집단의 공격 앞에서 유는 꼼짝없이 자신을 포기하려 한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구요. 난 혼잔데」

「아빠도 있고 네 남자친구도 있잖아. 진우가 네 결백을 증언해줄 거야」

  섣부르고 진지하지 못한 말이 유의 상처를 찌른 것일까. 다시금 상처에서 해일처럼 솟아올라 줄줄 흘러내리는 유의 눈물. 

「아빠 한 번도 믿은 적 없어요. 내 상처 따윈 관심 없고 학교 출석만 고집해요. 남자친구도 내가 걸레로 몰리고 나니 얼마 후에 연락을 끊었어요. 지금은 걸레라고 비난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들었어요. 자기는 유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내 맘 알기나 해요? 난 세상에 혼자라구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게, 아니 자신에게 대드는 유. 꿰맬 수 없는 자상으로 헐떡이는 영혼이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피 흘리고 있다. 이중의 상처로 고통받았을 아이의 영혼이, 모두에게서 외면당한 아이의 영혼이 내 가슴을 친다.

「유, 왜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유가 고개를 든다. 

「넌 혼자고 그 아이들은 집단이라는 사실, 모든 두려움은 그것에서 출발하는 거란다」     

 그랬습니다. 나는 혼자였고 그들은 집단이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그들의 분노를 꺼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일인으로 지목되었고 홀로 가해자로 남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폭력과, 무기력한 엄마를 향한 절망과, 불화한 부모 사이에서 느꼈던 불안과, 친구들 사이에서 얻은 희의 고뇌는 모두 잊혔고, 시詩만 홀로 가해자로 남았습니다. 희로 하여금 우울증에 함몰시킨 부모도 친구도 그 순간 모두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여러 회기 시詩 상담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조언하지 않은 채 함께 좋아했던 팀원들도 희의 죽음과는 관련 없는 배심원이 되었습니다. 희가 죽기 전날 아침, 밝은 얼굴로 센터에 갔다는 아버지의 말은 원고석의 증언이 되었습니다. 피고에게는 소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희의 죽음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정황과 관계없이 희가, 사랑하는 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목숨 앞에서 나의 내면은 솜털처럼 가벼운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꽃다운 그 아이가 죽었는데 나의 내면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의 변명조차 못한다 해도 어떻게 억울하다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만약 한 점이라도 시詩가 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어떻게 제가 숨 쉴 수 있었을까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평생에 딱 한번 과거로 회귀할 수만 있다면, 희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그 아이를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례회의에서 시詩 상담은 감정적이라고 강하게 거부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시를 전혀 모르는 바보라도 될 것입니다. 따뜻하게 대해준 분들도 기억합니다. 정죄하지 않고 이해해주려는 눈빛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한 줄기 희망이 되어준 그분들에게 나도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옹알이 하듯 가갸거겨 혀 위에서 조음되지 못한 소리들이 버둥거릴 뿐 분명한 발음은 선사의 기억처럼 희미하기만 했습니다. 

 뭉크는 그래서 평생 그림을 그렸을까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누나의 죽음을 나란히 겪었다 해도 강박적으로 어두운 그림만을 남긴 뭉크가 쉬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평생 집요하게 자신의 내면만을 그렸던 그 남자의 심리를 다 수용할 수는 없었지요. 애써 밝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무의식에 왜 빛을 주려 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보는 이도 질려버릴 듯한데 그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이 싫지 않았을까 하구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뭉크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것이라고. 그림이 거울이 되어 자신을 비춰준 것이라고.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상처가 결국 치유된 것은 그림을 통해 어두운 내면을 끊임없이 탐색하면서 객관화한 때문이라고. 이것이 내 모습이구나, 끔찍하게 보고 싶지 않은 진짜 내 모습이구나 하구요. 그림이라는 거울 앞에서 쉼 없이 자신을 비춰보던 뭉크를 마음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왜 당신이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답이 있을까 하여 당신이 선물한 책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아직 분명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당신은 꼭 답을 주시리라 기다립니다. 열다섯 살, 강원도 오지로 떠났던 여름수련회에서 당신을 만난 이후 지금껏 당신은 나와 함께였습니다. 사위가 고요한 밤, 자정이 넘어도 잠이 오지 않아 텐트 밖으로 나와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 헤아릴 수 없는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엔 은하수가 남북으로 금빛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빛나는 별빛들은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전 별에서 출발하여 그 순간 나의 눈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를 비추기 위해 몇 천 광년 오래도록 달려온 별빛들……. 아름답고 완전한 우주였습니다. 영혼의 탄성을 자아내던 나는 그 순간 당신의 존재를 섬광처럼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 완전한 우주가 우연히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하구요. 혼돈하고 공허한 그곳에 질서를 심고 흑암이 깊음 위에 덮인 공간에 처음 빛을 비춘 당신을 그제야 알아보았습니다. 내 마음의 거울이 당신을 비춘 그 순간, 태초부터 당신은 줄곧 완전한 거울로 나를 비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아본 순간까지 태초부터 그 자리에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오랜 기다림은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고독을 무릅쓰고 당신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준 내게 어떻게 우연한 고통이 있겠습니까. 고통에도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내게 어떤 교만이, 어떤 음란이, 어떤 거짓이 있었던 걸까요. 그 어떤 죄에 내려진 당신의 형벌일까요. 나는 당신 앞에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당신이 주신 책이 거울인 듯 책에 써진 당신의 말 한 구절 한 구절을 깊이 음미합니다.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픈지 당신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사람들에게 피고인 나는 오직 당신 앞에서만 원고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당신 앞에 옵니다. 당신에게 고백하고,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이 선물한 책을 읽으며 숨을 쉽니다. 당신께 드리는 내 눈물조차 이기심의 결정체임을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당신은 평안으로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태초부터 나를 비춰온 당신의 거울 속 나는, 밤하늘 몇 천 광년 달려온 별빛처럼 반짝입니다. 오래도록 달려와도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좋습니다. 오직 당신의 거울 속에서만 나는 본래의 나입니다. 그 힘으로 나의 아픔과 사람들의 분노를 오늘도 다시 가만가만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는 일이 내겐 무척이나 아픈 일이지만 언젠가 나도 당신 앞에서 모든 걸 객관화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압니다. 당신은 내 마음의 처음과 끝을 이해하신다는 것을.     

「이것 하나만은 내가 분명히 알아. 처음부터 끝까지 넌 남자친구를 위로해주려 했을 뿐 그 아이와 섹스하지 않았다는 것을. 넌 남자친구에게 마음의 최선을 다했고 난 그런 네가 참 예쁘다. 네가 깨끗하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있다는 거, 네가 절망하지 않을 이유로 그거면 충분해」

「선생님이 알면 뭐가 해결되나요?」

「누군가 널 온전히 믿어준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 다수의 생각이 반드시 사실이 아닌 것처럼 한 사람의 생각도 얼마든지 사실일 수 있단다」

 유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 나의 말이 유에겐 무의미한 낱낱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일 뿐. 

센터 입구 벽에 걸린 둥근 거울을 가져와 유 앞에 세우자 여전히 동그란 눈을 뜨고 나와 거울을 번갈아 보는 유. 나는 오늘 유에게 상담자인가, 강사인가.

「자, 보렴. 거울 속의 너를.」

  자신의 상반신을 담아낸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

「이 거울에 비친 너의 모습이 완벽한 네 모습 그대로일까?」

  대답 대신 거울에만 시선을 둔 채 고개를 가로젓는 유.

「실제 너의 모습과는 좌우가 바뀌었지? 또 굴절에 따라 너를 다르게 보여주기도 한단다. 지금 학교 아이들은 자기들이 함께 만든 마음의 거울로 유를 바라보고 있어. 그 거울 속에 비친 유가 진정한 유는 아니야. 거울이 굴절되어 있으면 나도 남도 제대로 볼 수 없단다. 그 아이들도 지금은 자기들의 거울이 얼마나 굴절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없을 거야. 자신을 알기란 남을 알기보다 훨씬 어려운 거니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건 기적에 가까워. 내가 유, 너를 안다는 건 그래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야. 그 아이들의 거울이 있는 그대로의 너를 비출 때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럼 선생님은 오늘 나를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나를 제대로 비출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지만 그게 진짜 내 모습인지 모르겠구나. 내 모습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내 마음의 거울을 열심히 닦고 있었는데 내 모습은 아직 잘 보이지 않고 대신 유의 모습이 잘 보이네.」

「그럼 선생님 모습은 누가 비춰줘요?」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단다. 내 모습을 훤히 비춰줄 사람들을」

「그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요? 나는 지금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 사람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거야. 유야, 무섭고 아프겠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학교로 향해 가자. 상처를 회복하려면 숨지도 말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도 말아야 해. 힘들어도 몸은 친구들을 떠나지 말고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네가 순결하다는 걸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간 얼굴로 유가 묻는다.

「한 걸음씩 어떻게 가야 되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집단 안에 숨어있습니다. 모든 청소년들은 집단 속에 살고 있지요. 그 속에서 상처를 입기도 하고 회복과 치유의 경험도 합니다. 집단 속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을 무조건 격리하는 일은 그대로 두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굳어진 채 집단으로부터 격리되면 마음에 흑암 같은 우울이 시작되죠.」

 탐색하듯 몰입된 눈빛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다. 눈빛에 빨려들 것 같다. 우울증에 빠진 자녀가 치유될 수 있는 빛을 찾아 이곳 교육청 세미나까지 찾아온 부모들의 간절한 눈빛들. 흑암 같은 마음을 비춰줄 태초의 빛을 갈구하지만 결코 내가 줄 수 없다는 건 부모들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미로를 헤매는 부모들에게 우울에서 아이들을 구해낼 방안을 단답형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들의 왼편으로, 강의실 창밖엔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꽃잎을 떠나보내고 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 심장에 힘을 준다.

「강의하러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청소년상담센터 이선영 팀장이 아닌 부모님들의 친구 선영이라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하구요. 아마 함께 차를 타고 이곳 교육청이 아닌 상수동 당인리로 갔겠죠. 햇빛 잘 드는 예쁜 찻집에 나란히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무수한 벚꽃이 지는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봤을 거예요. 이따금 부모님들의 손도 잡아주면서 말이죠. 오늘같이 화창한 봄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흩날리는 벚꽃의 꽃비를 바라볼 때 부모님들은 어떤 마음인가요? 벚꽃엔딩이라는 거울이 비춰주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떤 모습인가요? 기쁨이나 설렘인가요? 아니면 슬픔이나 아픔인가요?」

 말을 하는데…… 가슴이 먹먹해온다. 아픈 자식 때문에 자신이 더 아픈 부모들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도 부모들도 공감으로 서로를 비춘다. 

「부모님들이나 저나 기쁨과 설렘으로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제야 아이들을 건강하게 비춰주는 맑은 거울이 될 수 있겠죠. 혹 심리 용어 중에 이마고imago라고 들어보셨나요? 쉽게 말하면 타인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우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구든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내 모습이 굴절되어 있다면 나의 실제 모습과 상관없이 많이 아파해야 합니다. 아이를 둘러싼 집단의 거울이 그 아이를 아름답게 비추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한 걸음씩 소망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자녀는 지금 어떤 거울 속에 살고 있나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부모님들의 거울이 있는 한, 자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맑은 거울로 자신을 비추는 부모의 사랑을 섬광처럼 깨닫게 될 자녀의 시간은 언제일까. 농밀한 어둠에서 자신을 반추하던 아이들이 부모의 거울에 투영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될 시간은 언제일까. 문득 아득해진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극성을 보신 적이 있나요? 우리가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 좌표가 되어주는 고마운 별이죠. 북극성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닿기까지 광속으로 달려도 팔백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아득한 거리를 달려와야만 별빛은 우리 눈앞에서 반짝일 수 있습니다. 북극성은 아주아주 오래 전에 빛을 보냈지만 팔백 년이 지나고서야 우리는 그 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죠. 그 자리에 서서 오래 기다려온 북극성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한 인간과 한 인간이 진실한 얼굴로 서로를 알기까지는 아득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한 집단이 한 인간을 알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래도 북극성을 출발한 빛이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마침내 나의 눈동자를 비추고 말 듯, 부모와 자녀가, 친구와 친구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비춰줄 시간은 꼭 오겠지요. 벚꽃엔딩이라는 거울이 기쁜 우리의 모습을 비춰줄 때가 꼭 오고야 말 거예요. 혼돈과 공허를 넘어 흑암을 비추는 태초의 빛처럼 말이죠…….」

 강의 중에도 자꾸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창밖으로 줄지어 선 봄날의 벚나무들. 순결한 사월의 빛 아래로 하롱하롱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무수한 꽃잎들이 꽃비 되어 흩날리고 있다. 저리도록 아프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게……

이전 09화 소설 <달맞이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