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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은신 Oct 07. 2023

소설 <달맞이꽃>

육체적 인간에서 정신적 인간으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

 스물세 살의 인아가 여름날의 능소화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인아의 미소는 자신의 얼굴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름햇살과 닮아 있다.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찍힌 인아의 영상은 단숨에 LTE를 타고 내 휴대폰으로 날아와 생생한 웃음을 발사한다. 높은 화소를 통해 선명하게 보이는, 상기된 딸의 발그레한 뺨에서 가슴 뛰는 설렘이 느껴진다. 인아를 향해 쏟아지는 남국의 뜨거운 햇살도 손끝에 만져지는 듯하다. 햇살을 손으로 비비면 손가락 끝에 오렌지색 파스텔이 묻어날 것만 같다. 빨간 민소매 셔츠를 걸친 뽀얀 팔도, 짧은 진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미끈한 다리도, 하얀 치아를 드러낸 건강한 미소도, 어깨에 걸쳐진 초록배낭조차도 상큼하고 싱그럽다. 인아는 지금 가슴 떨리는 여행의 출발점에 서 있다.     

 엄마, 드디어 출발지 생장에 도착했어요. 

 내일이면 곧 순례길 출발이에요. 

 이 길을 엄마랑 꼭 함께 걷고 싶었는데 넘넘 아쉬워요 ㅠㅠ 

 순례길 여정마다 풍경을 담아 보내줄게요. 사랑해요, 엄마♡♡♡     

 카톡! 카톡! 카톡! 

 발랄한 알림 음에 맞춰 프랑스 생장의 풍경들이 쏟아진다. 남프랑스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아름답다. 딸은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서쪽 끝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장장 800km의 순례길, 한 달간의 여정을 이제 막 출발하려 한다. 혼자 배낭을 메고 그제 서울을 떠났다. 심리학과 사학년인 인아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치열하게 공부하기 전, 한 학기 쉬는 시간을 갖고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 인간심리를 연구하고 탐색할 사람으로서 책에만 몰두하기 보다는 한 달 간 순례 길을 걸으며 조용히 인생에 대해 숙고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때 나는 인아의 뜻이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쓸쓸히 자조하며 답했다.

 “스물세 살의 너와 순례 길의 인생 묵상은 아무래도 안 어울려. 벌써 쉰 살이 돼버린 이 엄마라면 모를까.”

 묵상과 숙고.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인아에겐 역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무게감이 느껴지는 두 단어는 이십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미지의 길 중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탐험한다고 말하는 게 옳지 싶다. 인아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렐 수 있는 나이니까.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 최종 목적지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인 그 순례 길은 로마와 예루살렘처럼 기독교 순례자들이 열망하는 여정이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사도가 스페인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걸어갔다는 고독한 길이다. 성聖야고보의 스페인 식 이름인 산티아고는, 스페인 서쪽 끝까지 걸어가 복음을 전한 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 사도가 죽어서도 영원히 묻히길 원했다는 땅. 생전의 소망대로 그의 유해는 지금 산티아고에 있다. 순례 길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그곳에서 겨우 일곱 명의 전도열매를 거두었을 뿐인데, 야고보 사도는 왜 산티아고를 그토록 절절하게 사랑했을까. 실패에 가까운 전도의 길이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와서 분주한 일상을 내려놓고 조용히 걸으며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관조하고 묵상하는 곳이 되었다. 

 “엄마도 같이 갈래요?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엄마와는 말없이 걸어도 좋고 인생 선후배로 대화하며 걸어도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산티아고 순례 길엔 특별히 퇴직 후 찾아오는 오십대가 많다고 들었어요.”

 딸의 갑작스런 제안에 문득, 특별한 사랑을 주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 땅에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미지의 길을 걸어갔던 야고보 사도가 떠올랐다. 포도나무가 줄지어 선 아득한 밀밭 사이로 굵은 지팡이 하나 짚고 묵묵히 걸어가는 외로운 구도자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가슴 가득 불쑥, 돈과 명예, 일신의 안녕과 안일함을 모두 비운 채 야고보 사도의 마음이 되어 나도 그 사람의 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었다. 이제 막 오십대에 접어들고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신산해져버린 마음을 묵묵히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하나로 모으고도 싶었다. 살아온 지난 오십 년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고 요약하고 요약해서 작은 기념품처럼 가볍게 배낭에 넣어 돌아오고 싶었다. 분명하고 홀가분한 의미를 배낭에 넣어 돌아올 수만 있다면 가파른 피레네의 산길도 땀 흘리며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그 순례가 나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온 혈육과 함께 걷는 여행이라면 태양이 내리쬐는 남국의 순례 길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에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딸이 화두처럼 던진 산티아고에 인생의 답이라도 숨어있는 듯 이런저런 상념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리곤 이튿날 아침, 망설임 없이 팔월 말 프랑스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대설주의보가 발효됐던 일월의 그 날, 뜨거운 늦여름의 순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삼월부터 시작된 원인모를 열 오름 증세는 모든 계획을 흩어버렸다. 몸 속 깊은 곳 심장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순식간에 가슴과 목과 얼굴을 뜨겁게 데우며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열에 온몸은 땀범벅이 되곤 했다. 자의의 통제 밖에서 시작된 열은 하루에 수십 번씩 불가항력으로 올랐다가 급속하게 식으며 한기를 느끼게 했다. 열기와 한기가 차례로 엄습할 때마다 몸속에 내재된 어떤 위험이 감지되곤 했다. 피부 겉면의 차가움과 몸속의 뜨거움이 공존하는 순간은 내 안에 두 인격이 사는 것처럼 낯설었다. 사월과 오월을 지나면서 세상은 화창한 봄으로 가득한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오르는 열은 의지로 차단되지 않았다. 급히 냉 수건을 심장에 갖다 대면 열은 조금 나아졌지만, 사람을 만나거나 수업을 할 때 열이 오르면 속수무책이었다.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날 수도 없었고 냉 수건으로 심장을 식힐 수도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람들을 대할 때면 고문을 받는 듯 힘들었다. 밤이면 증세가 더 심해져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설핏 잠들었다 수시로 깨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맞는 아침은 고통스러웠다. 잔뜩 벼르고 잠복해 있던 누군가가 수시로 나타나 괴롭히는 느낌에 시달리면서 피해의식이 생겨났다. 이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어서 내면적으론 자주 우울해졌다. 한 학기 병가를 내고 쉬었지만 열 오름 증세는 초여름까지도 계속되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내게 지인들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갱년기 증세라고만 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웃음기마저 담아 말하길, 증세가 심할 뿐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때가 되면 다 지나가는 순간이라 했다. 과장된 엄살로 비칠 듯하여, 누구에게도 마음껏 괴로움을 토로할 수 없었다. 

 “아주 심한 안면홍조 증상입니다. 갱년기가 되면 난소기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여성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습니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부족하면 자율신경계에 혼란이 오고 체온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죠. 마지막 생리는 언제 있었나요?”

 의사의 말에, 작년부터 있다 없다 반복되던 생리현상이 이월 이후 완전히 끊어진 상태란 걸 새삼 상기했다. 그러니까 삼 개월 정도 생리가 없었던 셈이었다. 있다 없다 했으니 언젠가 또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몸에 대해 온전한 배려가 없었던 스스로에게 그제야 자책이 일었다. 초음파를 통해 자궁과 난소를 면밀히 관찰하던 의사는, 진찰대 위에 누운 내게 무정한 판사가 최종선고를 내리듯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난소 퇴화가 진행 중입니다. 작년 초음파 사진과 비교해 난소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어요. 여성호르몬이 거의 분비되지 않는다는 의미죠. 호르몬이 갑자기 차단되니 몸이 방향을 잃고 맘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파도처럼 일어난 감정은 슬픔이었는지 분노였는지 자기연민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건 마치 갑자기 일어난 사고와도 같았다. 자유롭게 뛰던 다리가 힘을 잃고 자유롭게 노래하던 성대가 소리를 잃는 것과도 같은 육체의 사고였다.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여성성을 강제로 도둑맞은 듯 했다.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던 여성성이 아닌가. 수십 번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여전히 여성이고 싶었다. 부드러운 머릿결, 곡선의 얼굴과 몸매, 달콤한 향수와 아름다운 화장, 따뜻하고 섬세한 정서, 맑은 미소와 청순한 마음, 풍성한 모성애와 깊은 자비심, 성숙한 태도와 정결한 영성, 나는 여성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생리가 끊어진 후 일 년이 가장 괴로운 만큼 호르몬제를 처방해 드릴 수는 있어요. 인공적인 호르몬 투여가 암의 발생률을 높인다고 다들 우려하지만 그냥 견디는 것보단 삶의 질이 훨씬 높겠죠. 교통사고가 무서워 운전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 인공적인 호르몬제가 꺼려진다면 호르몬 역할을 하는 자연약품을 드시는 것도 제한적인 대체요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달맞이꽃씨 기름이나 칡즙 같은 것들이죠.”

 집으로 돌아와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허망함으로 차올랐다. 갖가지 용도의 화사한 화장품들이 의미를 잃고 우두커니 정물로 놓여 있었다. 여성성으로 충만한 젊고 건강한 여자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약간의 나르시시즘으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볼 때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딸을 낳을 때 외에는 입원해본 적도, 많이 아파본 적도 없었는데 어느새 여성성이 말라버린 몸이 되었다니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여성이지만 더 이상 육체적으로 여성이 아닌 듯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신경이 예민해졌다. 물론 딸과 함께 답을 찾아보려했던 화두 산티아고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800km 순례 길을 열 오름 증상으로 채울 순 없었다. 인간 최고의 욕구인 묵상은, 기본의 욕구인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남았지만 스물세 살의 딸은 엄마 때문에 결코 자신의 계획을 망설이거나 미루지 않고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 떠났고 이제 막 그 길을 출발하려 한다. 

 카톡!     

 아침에 출발하려면 지금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오니 어떡하죠? 

 엄마, 설레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설렘으로 터질 것 같은 스물세 살의 심장은 어떤 것일까. 인아와 같은 나이였을 때 내 속에서 열정으로 뜨거웠던 심장은, 쉰 살이 된 지금 열 오름 증상으로 자주 뜨거워지곤 한다. 열 오른 심장을 식히고 싶어 매일 달맞이꽃씨 기름을 섭취하는 나의 몸에 스물세 살의 심장을 이식한다면, 몸은 다시 회복되어 헛열이 내리고 대신 오직 열정으로만 뜨거워질 수 있을까. 


                                                                      *

 “인아니? 톡이 쏟아지네. 지금 프랑스래?”

 “응. 이제 내일이면 순례길 출발이라고 사진도 보내고 신났네.”

 “예쁜 딸과의 순례 대신 나와의 강릉 여행이라니……. 많이 아쉽지?”

 서울에서 지금껏 말없이 운전만 하던 혜신이 희미하게 웃으며 내 핸드폰 속의 인아를 곁눈으로 쳐다본다. 차창 밖 늦여름의 햇살 아래서도 혜신의 핼쑥한 옆얼굴이 사진 속 인아의 환한 미소와 비현실적으로 대조된다. 자잘한 주름과 건조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는, 어느 새 나이 들어버린 혜신이다. 

 “아냐, 나의 베프님과 이렇게 여행하는 게 더 좋아.”

 혜신을 처음 만난 건 사범대 국어교육과 신입생 OT에서였다. 스무 살의  그녀는 얼마나 싱그럽고 예뻤던가. 처음 만난 그 순간, 그녀의 지적인 분위기와 따뜻한 눈빛에 매료되어 평생의 친구가 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처음 만났지만 데자뷔처럼 우리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둘의 성정은 닮아 있어서 같이 있으면 평상복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고 심리적 방어가 필요 없었다. 우린 같이 시詩를 사랑하여 시인이 되길 열망했지만 결코 과잉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둘 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이십오 년을 일해 오면서 서로의 존재를 기댈 수 있는 울타리처럼 든든히 여겨왔다. 새삼 빠르게 지나온 세월이 한여름 밤의 꿈만 같다. 

 “혜신이 너야말로 스무 살 때 정말 예뻤는데, 언제 이렇게 삼십 년이 훌쩍 흘러버렸을까?”

 엷은 미소가 혜신의 입가에 번지려다 이내 사라진다. 그녀는 활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아무런 외식 없이 투명하게 웃을 때 그녀의 볼에 패던 보조개는 상대방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이십대는 물론 삼십대에도 구혼하는 남자들이 주변에 많았지만 교통사고로 일찍 다리불구가 되어버린 과부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무남독녀 외동딸로 둔 외할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에 혜신은 모든 구혼을 뿌리치고 독신으로 지내왔다.

 “스무 살? 우리에게도 그런 나이가 있었나? 왜 난 한 번도 네 딸 인아처럼 내 인생을 위해 거침없이 살아보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항상 다른 사람만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 이렇게 쉽게 쉰 살이 되기엔 억울한데……. 생각해보면 난 스무 살에도 이미 쉰 살이었던 것 같아.” 

 운전대를 잡은 가녀린 팔목과 왜소한 몸피가 새삼 혜신의 우울을 환기시켜준다. 연약한 몸피로 자신의 인생과 엄마의 인생, 외할머니의 인생까지 지탱해 온 그녀를 생각하니 진한 연민이 일어난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남의 중병보다 고통스럽기 때문일까. 열 오름 증상으로 괴로워하느라 혜신에게서 봄 내내 소식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안부를 묻지 못했다. 증상이 완화되면 자연스레 만나리라 여기며 석 달을 보냈다. 유월이 끝날 무렵 열 오름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전화하니, 혜신도 학교에 육 개월 간병휴직 청원서를 낸 채 집에 칩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생의 욕구들이 사라져버린 듯 마음이 우울하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중풍이 심해져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어머니는 허리디스크 수술 이후 거동이 더 어려워져 사람을 들여 함께 보살피는 중이라 했다.

 “명주 넌 딸이 있어서 좋겠다. 딸은 엄마의 진실한 친구니까.”  

 “그래, 엄마에게 딸은 좋은 친구지. 누구보다 혜신이 네가 네 어머니랑 평생 서로를 품어온 진실한 친구잖아.”

 “그러면 뭘 해. 외할머니와 엄마를 돌봐온 나도 이제 시들어가는 걸. 언제까지나 두 사람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 줄 여겼는데 이제 나도 심신이 지치니까 자꾸 미래가 두려워져…….” 

 서른 살 무렵, 혜신은 유일하게 마음을 주며 결혼을 꿈꾸던 선배와 끝내 헤어졌다. 무남독녀로 병든 어른들을 책임져야 하는 처녀를 선배 집안에서 꺼렸고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헤어진 터였다. 그날 밤 혜신은 자정 넘어 내게 전화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가라앉아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이상할 만큼 들떠 있었다.

 “명주야, 아까 저녁에 TV를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어. 한 엄마의 자궁 속에 태아로 숨 쉬고 있는 여자아기 말이야. 그 아기의 몸 속 작은 난소 속에 미래의 생명체가 될 난자들이 희미한 난포형태로 들어있대. 정말 신기하지 않니? 음…… 그러니까, 명주 네가 네 엄마 뱃속에 태아로 있을 때 이미 너의 난소 속에 네 아기 인아의 생명체가 들어있었던 거지. 한 여자 안에 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 안에 또 한 여자. 신기하지 않니? 난 가끔 왜 내가 외할머니 인생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신이 왜 나에게만 유독 무거운 짐을 주시는지 이해가 안됐어. 그런데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외할머니는 자궁 속에 우리 엄마뿐만 아니라 비록 반쪽의 존재였지만 나도 품었던 거야. 외할머니 속에 엄마가 있었고 엄마 속에 내가 있었던 거지. 명주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내 말 이해하니? 외할머니가 내 생명도 품었던 거라고. 외할머니랑 엄마랑 나랑 결국 한 몸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지? 그렇지?”

 혜신은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쫓기듯 말했다. 이십 년 전 졸음 속에 인아를 재우면서 들었던 혜신의 말은 강박증 환자의 모노드라마 대사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을 홀로 환하게 비추는 연극 무대 조명 아래서나 고백할만한 심리적 독백으로 들려왔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근무하다 퇴근해 저녁을 준비하고 인아를 돌보는 일에 지쳐버린 난 혜신의 말을 깊이 새겨볼 틈도 없이 혼곤한 잠에 빠져버렸다. 그러다 아주 잠깐, 새벽에 깨서 칭얼대는 인아를 다독이며 엄마의 자궁 속에 태아로 존재했던 나와, 태아인 나의 난소 속에 미지의 생명체로 존재했던 인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오래 전에 나와 인아를 품었으나 이미 오십대 후반에 접어든 엄마의 늙은 자궁도, 그리고 엄마의 엄마,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말로만 들었던 외할머니의 엄마의 자궁도 떠올렸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오는 역사의 기저에 숨은, 전설 같은 여자들의 자궁을 생각했다. 생명을 품고 낳고 키우고 그리곤 마침내 늙어서 퇴화해온 그녀들의 따뜻한 자궁을……. 서른 살 나와 혜신의 건강한 자궁에도 결국은 퇴화의 시간이 오고 말 거란 걸 그때는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인아도 나를 지켜줄 수 없을 때가 오겠지. 젊은 인아의 자궁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퇴화되고 말테니까. 누구든 예외는 없으니까.”

 “그래도 네 딸 인아는 지금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니까 쉰 살이 된다 해도 아쉽진 않을 거야. 정말 인아가 부럽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 싶다가도 자꾸 뭔가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이 느낌은 뭘까?”

 혜신은 자기 삶의 회한으로 마음의 병이 든 건 아닐까 싶다. TV에서 본 의학상식 하나로 자신의 운명에 당위성을 부여하고는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몸과 맘이 예전 같지 않고 불면증도 찾아오면서 자기연민에 온전히 빠져버린 듯하다. 정면을 향한 채 넋두리처럼 얘기하는 혜신을 바라보니 총명하던 눈동자는 힘을 잃고 손질하지 않은 머릿결은 푸석하다. 그나마 칩거하던 혜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여행을 감행한 건, 열 오름 증상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고백하는 내게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문안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친구도 오십의 문턱에서 예외 없이 힘들어하자, 어떤 여자든 인생의 과정이 다르지 않다는 걸, 자신도 그 길을 걷고 있을 뿐이란 걸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자궁으로 품었던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돌보느라 시간을 소진해온 혜신이도, 자궁으로 품었던 딸을 돌보느라 시간을 소진해온 나도, 현실을 살아내느라 시인의 꿈을 유예해온 여자들이 아닌가. 다만 혜신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을 테다. 몸은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이제 자신을 돌보라고 호소하는데 현실은 여전히 누군가를 돌봐야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우울을 불렀을 테다. 

강릉에 가고 싶다고 먼저 말한 건 혜신이었다. 몇 해 전 함께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고 그녀의 생가를 방문해보자고 약속했지만 서로 바빠 차일피일 미뤄오던 터였다. 열 오름 증상이 잦아든 나도 문학여행을 핑계로 답답했던 칩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꾸역꾸역 나를 채찍질하며 달려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아. 명주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달려야 할까? 때론 다 놔버리고 싶어.”

 혜신이 텅 빈 눈으로 속에 든 진심을 내보인다.

 “달릴 수도 없고 놔버릴 수도 없을 땐 언제든 쉬어 가면 되지.” 

 운전대를 잡은 혜신의 손을 따뜻하게 덮어주자 나의 격려가 진실임을 증명하듯 눈앞에 고속도로 휴게소의 표지판이 선명하게 다가선다. 휴게소구나. 그래 혜신아, 우리 이제부턴 천천히 쉬어가자.


                                                                      *

 강릉에 들어서자 차창으로 스며드는 늦여름 저녁 햇빛이 한결 얇아져 있다. 낮게 엎드린 시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여류시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실존했던 곳이기 때문일까. 고전적인 묵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듯하다. 묶였던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진다.

 “그 약은 매일 먹어야만 하는 거야?”

 “응,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가방에서 약을 꺼내 생수와 함께 넘기는 내게 혜신은 담담히 묻는다. 달맞이꽃씨 기름을 정제하여 만든 갱년기 증세 완화 약을 먹은 지 석 달째. 열 오름은 팔월이 되어서도 가끔 불쑥 찾아와 여름의 열기로 달아오른 몸을 더 뜨겁게 담금질 할 때가 있다. 몸속으로 스며든 달맞이꽃씨 기름이 몸의 변화에 어찌할 바 몰라 날뛰는 자율신경계를 끊임없이 타이르고 다독이는 중인 듯하다. 괜찮아. 괜찮아. 넌 그대로의 너야. 달라지는 건 없어…….  

 ‘늙음은 아니지만 젊음도 될 수 없음’이 선고된 폐경의 몸, 신이 비밀스레 젊음의 묘약을 타놓은 여성호르몬이 말라버린 몸은 달맞이꽃씨 기름에 위로받고 있다. 

 “달맞이꽃의 씨에서 나오는 기름을 짜서 만든 약이래. 뭐라더라? 그래, 감마리놀렌산이라는 성분이 많아서 갱년기 여성에게 굉장히 좋대.”

 “달맞이꽃? 달맞이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떤 꽃이니?”

 “나도 본 적은 없어.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고 하니 달맞이꽃도 우리처럼 나이 든 꽃일지도 몰라.” 

 혜신과 나는 오랜만에 서로 거울을 보듯 마주보며 환하게 웃는다. 순간,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든든한 위로가 된다. 멀리 경포호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물 내음이 나는 듯하다. 팻말을 보니 소녀처럼 맘이 설렌다.     

 허난설헌 생가 2km     

 “명주야, 서른일곱 살에 요절한 난설헌은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죽을 수 있어서 행복했을까? 젊은 육체도 젊은 정신도 낡지 않고 그대로 빛나는 채로 죽었으니 말이야.”

 “고통 속에 살다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는데 행복했을 리가 없지. 다만 삶의 후반부에 정체성이 흔들리는 혼란은 없었을 거야. 사실은 나도 자궁이 퇴화하고 여성성이 사라진 내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거든.” 

 육체적 아름다움이 사라진 죽음도, 정신이 흐려진 사람도 온전한 그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주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다. 다만 스스로를 위로하듯 혜신에게 위로를 건넨다.

 “생사의 기로에서 투병하는 네 외할머니도, 간병인 없이는 못 움직이는 네 어머니도 혜신이 너에겐 여전히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해. 퇴화한 자궁을 뱃속에 담고 있어도, 희미한 정신의 날줄을 붙잡고 있어도, 두 분은 여전히 널 따뜻하게 품고 있으니까. 이십 년 전에 네가 그랬잖아. 품는다는 건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뜻이라고.”

 “내가 그랬어? 그래, 그때도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겠지.” 

 저녁 햇빛 아래서 허난설헌의 생가는 숨죽인 듯 조용히 엎드려 있다. 고색으로 옷 입은 정갈한 한옥이 늦여름 저녁 내음과 잘 어울린다. 집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깃든 사람 때문이라는 말은 옳다. 이 집에서 ‘초희’라는 이름으로 태어나고, 아이로, 소녀로, 그리고 처녀로 살았던 허난설헌. 그녀를 생명처럼 품었던 자궁이기에 이 집은 흠모할 만큼 아름다운 것일 테다. 우리는 천천히 대문을 지나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부엌을 돌며 집에 스민 그녀의 체취를 따라가 본다. 초희가 스승 이달에게서 학문을 배운 방이라는 별당 앞, 수국나무가 그녀의 화신인 듯 소박하고 청초한 자태로 서 있다. 경포호수의 맑은 물 내음과 푸른 해송으로 둘러싸인 이 집에서 비단옷으로 단장한 초희가 아름다운 수를 놓고, 스승에게서 글을 배우고, 총명한 눈빛을 들어 진리를 사유하며, 단아한 몸짓으로 시를 짓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강가 

 문 앞의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지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단 배 매어놓고 

 짝지어 다니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지요.


 이 집에서 자라는 동안 청순하고 맑은 시어들의 모태가 됐던 초희. 그때 그녀는 아주 조금이라도 예감했을까, 신산하기만 했던 그녀의 미래를. 시부모의 학대와 남편의 열등감어린 외도, 아이들의 죽음, 뱃속 아이의 유산, 친정의 몰락, 아버지의 객사, 형제들의 비참한 죽음을……. 그녀는 폭풍 같은 고난 앞에서 서른일곱 살 요절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렸다. 그리고 바람처럼 이 땅을 떠나버렸다.

 “초희가 고난에도 끄떡없이 신이 부를 때까지 끝까지 살아냈다면 어땠을까? 육체와 정신이 흐려져 가는 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며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 중년이 되고 늙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시를 썼다면 말이야.”

다른 시대에 서 있는 초희의 분신인 양 그녀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혜신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찾아 여기까지 온 사람처럼 묻는다.

 “글세……. 초희가 끝까지 살아냈다면 응축된 고난이 깊은 울림의 시를 만들어냈겠지. 그저 맑은 시정詩情이 아니라 인생을 위로하는 넉넉한 시정으로 말이야. 초희는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고 싶은 태양의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네. 태양이 사라지기 전 젊음인 채로 서둘러 이 땅을 떠나버렸으니…….”

 고통 앞에서 몸을 떨었던 초희를 상상해본다. 초희가 만약 하늘이 주신 한 줌의 마지막 생명까지도 끝까지 살아내면서 엎드려 시를 썼다면 고난의 자궁으로 낳은 그녀의 시는, 죽은 육체의 자식들을 대신하여 진정한 그녀의 자식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언젠가 성장하여 세상으로 나가 많은 이들에게 소망을 주지 않았을까. 

 “고난 속에 난포로 숨어있던 문학적 상상력을 자궁에 품고 키워서 천천히 세상 밖으로 흘려보냈다면, 늙어 퇴화해버린 초희의 자궁도 더 아름다운 의미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명주야, 세상 누구도 남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 초희의 선택에 대해 우리가 뭐라 평가할 수 있겠니?”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혜신아, 사람이든 문학이든 그 속에 품은 생명이 가장 귀하지 않을까? 생명이 바로 의미니까.”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내일도 이곳에 한 번 더 와보자.”

 초희의 자의적 죽음에 공감하지 않는 내게 혜신이 초희가 되어 반문하고 변호한다. 혜신의 눈빛이 이곳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듯 간절해져 있다. 우린 둘 다 새삼 말을 잃은 사람처럼 각자의 상념에 젖는다. 초희의 삶과 시詩의 향기가 묻어나는 생가를 천천히 돌며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

 저녁을 먹고 펜션에 들어서니 서쪽하늘 멀리 태백산맥의 등줄기 위로, 진정 뜨거웠던 여름에게 고별의 인사를 건네는 낙조의 붉은 빛이 가득하다. 긴 듯 짧았던 여름을 아쉬워하며 붉게, 점점 더 붉게 저녁하늘이 물들고 있다. 열정의 여름이 성숙의 가을로 거듭나려면 저렇게 하늘도 붉게 달아오른 안면홍조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걸까. 

 뜨거운 햇빛 아래서 고단했던 낮의 여정을 마감하는 대지는 여름 저녁의 향긋한 풀냄새를 뿜어내고, 경포호수가 바라보이는 삼층 방은 아늑하고 시원하다. 샤워를 마치고 나란히 경포호수 산책길에 나서자 회색빛으로 어두워지는 밤하늘과 호수의 시원한 바람, 샤워 후의 상쾌함이 하루의 피곤을 풀어준다. 이미 휴가철이 지나버려 한적한 호숫가엔 드문드문 연인들이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걸어가고, 바닷길이 막혀 생긴 거대한 호수 위에 조금씩 어둠이 내린다. 진정 뜨거웠으나 짧기만 했던 여름이 이제 정말 지려나보다. 초희도 서울로 시집가며 저런 하늘을 바라봤을까. 여름이 서서히 지는 걸 보면서 그녀의 젊고 행복했던 시절도 끝나가고 있다는 걸 한끝이라도 예감했을까. 아직 그녀의 자궁 속에 난포로 숨은 시어들을 품고 낯선 미지의 땅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그려본다. 문득 그녀를 향해, 당신의 숨은 난포를 어떤 고난에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뜨겁게 그리고 간절하게 소리치고 싶어진다. 

 시원한 저녁바람 때문일까. 혜신도 나도 말이 없지만 몸은 편안하고 마음은 평안하다. 하루 종일 우울하던 혜신의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천천히 걸으며 호숫가 습지를 지나자 상큼한 흙 내음이 훅 끼쳐온다. 

 “어머, 저 꽃 좀 봐!”

 혜신이 놀라 소리친다.

 “무슨 꽃?”

 “저기 노란 꽃! 곧 밤인데 무리지어 활짝 피었네. 저 꽃 이름이 뭐지?”   혜신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호수를 배경으로 키 큰 꽃들이 노란 얼굴로 가득 피어 있다.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꼭 밤하늘 달무리 같다. 호기심으로 다가가자 저녁바람에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민다. 첫눈에도, 꽃은 모습보다 향기가 훨씬 아름답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처음 보는 꽃이야.”

 초록 줄기 끝에 달린 네 장의 노란 꽃잎을 손끝으로 만지며 섬세하고 부드러운 결을 느껴본다.

 “그 꽃 말씀이오? 그거 달맞이꽃이라오.” 

 산책하던 노부부가 웃으며 답해준다.

 “예? 달맞이꽃이요?”

 우연일까. 혜신과 나는 초희의 생가에 이르기 전 차 안에서 얘기했던 나이 든 꽃을 떠올리고는 또 마주보며 환하게 웃는다. 

 “낮에는 오므려져 있다가 달이 뜨는 밤에 활짝 핀다고 해서 달맞이꽃이라고 한다오.”

 “그래요? 우리는 이 꽃 처음 봐요.”

 “아니야. 모르긴 몰라도 아마 살면서 여러 번 봤을 거요. 어디든 흔하게 피어있는 들꽃이고 특별히 화려하지 않아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꽃이라오. 여름엔 들이나 둑길에 지천으로 피지요.” 

 “아, 그런가요? 우린 달맞이꽃을 보고도 몰랐네요.” 

 “달맞이꽃이 있는 곳에 언제나 달도 있소.” 

 어르신이 하늘의 달을 가리킨다. 동쪽 밤하늘 거기, 하얀 달이 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본 우리는 아주 당연한 일에 기적이라도 본 듯 감탄한다.

 “아! 정말이네요. 진짜 저기 달이 있네요.”

 “대부분의 꽃들이 해를 따라 피지요. 예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밤에 이렇게 피어서 세상을 밝혀주고 달에게도 친구가 되어준다오. 여기 두 사람도 친구시오?”

 “예. 하하하”

 우린 마주보며 다시 한 번 더 크게 웃는다.

 “두 사람도 달과 꽃처럼 서로 좋은 시간 보내시오.” 

 달과 꽃. 

 미소를 머금고 멀어져가는 어르신의 달맞이꽃 소개는 묘한 감동을 전해준다. 늘 곁에 있었던 꽃을 오십 년 만에 알아보다니, 세상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존재가 가득함을 또 느낀다. 혜신은 호수를 비추는 달에 시선을 둔 채 여전히 감격해 있다. 건조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저녁 습기에 젖는다. 

 “그래, 정말 그렇구나. 아침과 낮에 피는 꽃만 꽃이 아니네. 태양빛을 받지 못해도 얼마든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이십 년 전 전화했던 그날처럼 혜신의 목소리는 까닭 모르게 들떠 있다.

 “명주야, 쉰 살 이후의 여자를 세상은 더 이상 주목하지 않잖아. 우리도 이젠 태양을 따라 눈부시게 피는 꽃은 될 수 없겠지. 그러고 보면 낮에 피는 꽃들은 아름답긴 한데,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그렇다면 태양을 따라 피는 꽃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핀다는 뜻이 되겠지? 그런데 달과 꽃은 서로를 응시하면서 이렇게 기쁨으로 비춰줄 수 있구나.”

 다시 연극 무대 조명이 그녀에게 모아지고 혜신은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 내면의 대사를 독백한다. 문득 스무 살 신입생 OT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의 혜신이 느껴진다. 그녀가 사랑하는 시詩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혜신이 독백 속에 보인다. 햇빛 아래서 선명하게 드러나던 자잘한 주름과 건조한 피부, 푸석한 머리도 여린 달빛에 숨겨진다. 마르고 핍절한 몸의 경계도 흐린 달빛에 녹아든다. 달빛이 그녀의 모든 걸 넉넉히 감싸 안는다.

 ‘그래 혜신아. 이제 우리 달맞이꽃으로 살자. 달빛 같이 부드러운 세상에서 존재를 위로하는 달맞이꽃으로…….’

 하지만 달맞이꽃에 몰입된 혜신에게 입을 열어 맘을 표현하진 못하겠다. 그녀는 이미 달맞이꽃으로 살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돌보며 살아온 그녀의 시간이 이미 달맞이꽃의 삶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그 동안 왜 몰랐을까? 이런 어두운 시간에 조용히 피는 꽃이 있다는 걸. 아까 어르신 말처럼 너무 흔해서 몰랐던 걸까? 그러고 보면 인생의 반은 밤에 속해 있는데 왜 그 시간을 마이너리티의 시간으로만 여기며 살았을까?”

 달빛 아래서 잔잔히 이어지는 혜신의 조용한 고백……. 

 “태양 아래 피어있는 동안은 그것만이 전부라고 믿었어. 모두가 집을 찾아 떠난 밤에도 여전히 바람은 불고, 나무는 숨을 쉬고, 이렇게 달맞이꽃이 달을 위무하며 핀다는 걸 잊고 살았어. 태양에만 매료되어 있었나봐. 달빛 세상엔 왜 관심조차 없었을까? 태양이 숨어버린 시간에도 고요한 달빛이 이렇게 어둠을 부드럽게 만져주는데…… 명주야, 폐경이 되어버린 우리도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인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달빛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성으로 말이야.” 

 자신을 표현하려 태양을 열망하는 대신 자신을 내어주며 달빛에 응하는 꽃에 매료되어, 잠자던 혜신의 시심詩心이 눈을 뜬 것일까. 혜신은 마치 시인이 시를 낭송하듯 내면의 언어들을 달빛 가운데로 흘려보낸다. 혜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퇴화된 자궁 깊은 곳, 화석처럼 굳어버린 난포 속에 숨어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시심詩心이 아니었을까.


                                                                     *                                

 천천히 걸어 펜션으로 돌아오니 두고 갔던 휴대폰에 인아로부터 장문의 톡이 와있다. 

    

 엄마, 순례 길을 출발하는 첫날 아침인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800km를 걸으며 아무리 깊은 묵상을 한다 해도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은 그곳에 닿기 전까지 진정으로 알 수 없을 거란 생각이요. 산티아고는 개념이 아니라 실체니까요. 산티아고가 어떤 땅인지는 그곳 땅을 밟고, 그곳 공기를 마시고, 그곳 풀과 나무와 사람과 건물을 만져봐야 알 것 같아요.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는 그냥 여정을 하나하나 느끼며 갈 수밖에 없겠죠. 

그래도 묵상의 순례시간이 헛된 건 아닐 거예요. 산티아고라는 목적지가 있고 하루하루의 길을 더할수록 목적지는 가까워지니까요. 산티아고에 이르기 전까지는 모든 시간이 설레는 소망인 거죠. 그곳에 이르기까지 돌부리 가득한 험한 길도, 고독한 산길도, 평탄한 보리밭 길도 걷게 되겠지만 모든 길과 모든 순간이 소중한 건 산티아고를 보게 되리라는 소망 때문이겠죠. 그 소망이 있는 한 누구도 순례를 그만둘 수는 없을 거예요. 앞으로 심리학자로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산티아고를 생각해볼 거예요. 그 사람이 잊고 있는 자신의 산티아고를 떠올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그랬어요. 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육체적 인간은 정신적 인간으로 변모해서 삶의 에너지를 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요. 그의 이론을 배울 땐, 육체가 쇠락해버린 인간이 외길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패배의식으로 느껴졌는데,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정신적 인간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결코 산티아고를 만날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어요. 엄마, 그래서 난 이 순례 길을 완주하고 싶어요.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성큼 가을이 와 있겠죠?  

   

 인아 말대로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인아는 돌아와서 내면의 산티아고를 찾기 위해 다시 공부에 매진할 것이고, 혜신은 여전히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달맞이꽃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열 오른 얼굴을 화장으로 덮어가며 나이 들어감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아 짧았던 그녀의 인생을 주목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 길을 걸으며 고난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그 길을 완주할 것이다. 그리고 뜨거웠던 지난여름, 태양의 계절이 못내 아쉬워 낙조로 벌겋게 달아오른 서쪽하늘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이제 곧 맑은 가을하늘로 드높아져 갈 것이다. 

언젠가 딸이 던진 화두에 답하듯, 지구 반대편 아침 태양 아래 서 있는 인아에게로 달빛의 언어를 보낸다.


 그래 인아야. 야고보 사도는 길 없는 곳으로 홀로 걸어갔을 뿐이지만 끝까지 걸어간 그의 첫걸음이 후대의 영원한 묵상의 길이 되었지. 야고보 사도가 걸어갔던 전도의 길이 일곱의 생명밖에 품지 못한 길이었기에 오히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또 걷는지도 모르겠구나. 외로웠지만 생명을 위해 끝까지 걸어간 그의 길 위에서 누구든 위로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인아야, 두려워 말고 너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렴. 너의 길이 어떤 길이든, 네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면 모두 의미 있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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