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약 400년간 종으로 살았다. 이집트에 종으로 끌려간 것은 요셉 한 사람이었으나 나올 때는 약 200만 명이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15년 동안 살았다.
중국에 가기 전 한국생활은 한마디로 불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26세에 결혼을 해서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남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 이유는 순탄치 못했던 내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 내 아버지는 결혼 전부터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인생을 낭비했다. 청소년기에 이발기술학원에서 일찍이 기술을 습득하여 이발사로 개인사업이 가능했지만,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가정생활도 경제활동도 신통치 못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면 약을 정기적으로 먹다가 어느 순간 약을 안 먹게 되고 밤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란을 벌였고, 집을 뒤집어 놓았다.
어릴 적 우리 집을 동네 사람들은 ‘일본 집’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오사카에서 봉제공장을 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한국인들이 일본을 떠날 때 조부모님도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2차 대전의 트라우마는 우리 집안을 고스란히 잠식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할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녔던 고모도 결국에는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가 625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결국에는 전쟁의 악령에게 포로로 잡혀 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불쌍한 생각이 든다. 지난여름에 우연히 5촌 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태백에 여행을 오셨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걸어서 2시간 거리에 살았고 법대를 졸업하여 동네에서는 제법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그 형님 댁에 가서 이발을 해 드렸다고 한다.
잘 들지 않는 이발기로 한 달에 한 번씩 내 머리를 자를 때면 한 번씩 머리가 뜯기는 기분이 들어 유쾌하지 않았다. 깎은 머리를 치우거나 물을 떠 오는 것은 꼭 나를 시켰다.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난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항상 결심했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를 몰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함께 자랐던 형제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늘 있어서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늘 중간에서 방황했다.
중국은 과거와 자연스럽게 단절된 생활이었다. 물리적으로 한국과 멀어지면서 형제간에도 연락할 일이 없어졌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자주 부대끼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나씩 습득할 수 있었다.
중국에 가기 전 한국에 있을 때는 아침 6시에 집을 나가서 밤 9시에 돌아오는 반복된 패턴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집에 월급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버지 역할이라고 믿었다. 다만 아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질 시간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달랐다. 중국어를 배우고, 아들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면서 아들의 어린 시절을 공유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한 번은 대학생 아들에게 중국생활이 어땠는지 물었다. 아들은 그 시절이 행복했고, 좋은 추억이라고 말했다. 아들보다 10년 늦게 딸이 태어났을 때는 정말 기뻤다. 아들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 둘째를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만 오면 늘 붙어있기를 원했던 딸내미 덕분에 내 인생도 훨씬 행복해졌다.
내 아버지에게서 정서적인 유산은 받지 못했지만, 중국생활에서 난 아버지로서 역할을 습득했고 정서적으로 큰 축복을 얻었다. 이제 아들은 대학원생이 되었고, 딸내미도 고3이라 곧 부모 곁을 떠날 것이다. 이만하면 내 인생도 축복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쫓겨났지만 난 아직도 중국이 그립다. 다시 갈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다.
그때까지는 안녕 베이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