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두번째로 선택한 곳은 인터넷쇼핑몰 ‘만물박사’였다.
종교행사관련 모든 물건을 인터넷으로 파는 곳이었다. 파주의 외진 곳에 건물이 있어 지하철에서도 가끔있는 버스를 타야 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그곳에서 숙식하면서 근무를 시작했다. 집에서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몽골 노동자 마따도 만났다.
처음에 왔을 때는 시킨 일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할까요?” 하면서 적극적으로 일했어.
지금은 그냥 시간을 떼우려고 그래!
사장이 짜증을 내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일당 10만원짜리 몽골노동자 마따가 하루종일 한 일은 스티커 붙이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의 가치가 일당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장이 불만이었다. 그는 몽골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아티스트였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힘 잘쓰는 외국인노동자일 뿐이었다. 나는 그와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 이곳에서 사장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사장은 회의를 시작하면 보통 한시간을 쉬지않고 말했다. 해박한 지식과 달변으로 웃기면서도 쓴소리도 많이 해서 회의가 끝나면 뭔가 찝찝했다. 주로 강조하는 것은 정리정돈과 주인의식이었다.
부분적인 일에 몰두하다보면 목적을 잊기 쉽다. 먼저 본 사람이 주도적으로 일하자. 테이블에 물건 올려두지 말라. 그가 항상 강조했지만, 정말 웃기는 것은 정작 정리를 안하는 것은 사장 자신이었다. 설명하기 위해 샘플을 가져오고, 다시 가져다 놓지는 않았다. 2층 건물에 온갖 물건들이 선반에 가득했지만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장과 제일 오래된 강팀장만 알았다.
기독교의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부터 시작하여 성금요일(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일)과 부활절 전날인 토요일까지 이어진다. 이전의 고난주간에는 주로 금식을 많이 했지만, 이때는 다른 방식의 고난이 있었다.
만물박사는 나이지리아, 몽골 외국인 알바를 포함해서 밤9시까지 계란을 각 교회에 배송했다. 이 일을 밤 늦게까지 책임감있게 매달리는 것도 작은 고난이었다. 이때만큼 고난주간을 깊이 묵상해 본 경험이 이전엔 드물었다. 매장 스타렉스로 한국인 알바를 야당역까지 데려다 주고, 남아있는 두 아줌마직원을 위해 딸기맛 바나나우유를 샀다. 몽골노동자에게 부활절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부활절 계란과 건빵에 송장을 붙이면 로젠택배가 가져갔다. 전날에는 작업이 많고 늦어져서 밤 8 시가 넘어도 끝내지 못했다. "이젠 더 이상 실을 수 없습니다!" 택배소장이 말했다. 나는 열심히 송장을 붙였다. 낮에 이천과 용인에 계란과 박스를 배달했고, 저녁에 일산에 건빵을, 유치원에 계란을 배달했다.
지친 몸으로 송장을 붙였지만, 도저히 강팀장의 속도에 따라가진 못했다.
부장님 왜 이리 오래 걸려요!
그곳 에서도 나는 그냥 부장으로 불렸다. 건빵박스 하나라도 더 보내려는 아줌마들의 열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알바로 일하는 분들은 이전에도 일한 경험이 있어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열심의 근원이 궁금했다. 내가 송장을 붙인 몇 건이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었다고 클레임이 들어왔다. 내 기억으로는 정확하게 붙였는데… 다른 사람이 잘 못 붙인 것을 뒤집어 씌우는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신참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지 반년만에 나는 길을 잃었다.
한국에 와서 만두공장, 인터넷쇼핑몰 알바를 하면서 내가 한국생활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사장은 말했다.
당신은 모양만 한국인이지 속은 중국인이야!
만물박사에서도 충동적이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장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고 결국에는 석달 만에 쫓겨났다. 원하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살다보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때가 된 것이었다. 당황스럽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이라 그렇게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겪고 싶지 않은 일을 통과해야 하는 게 고역이었다.
경의 중앙선을 타고 파주를 출발했다. 다음역은 곡산역이고, 종착역은 서울역이었다. 4호선으로 갈아타고 당고개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청학리로 가야했다. 언젠가 인생의 전철은 종착역이 올 것이다. 터널을 들어갈 때는 캄캄하지만 나오는 순간이 있다.
베이징에 살때는 순의에서 왕징까지 주로 전철을 타고 갔다. 지하철이 개통했을 때는 사람들의 패션이 무척 촌스러웠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내가 중국에서 나올 때 쯤에는 내 패션이 더 촌스러웠다. 그들은 화려한 패션과 화장을 했고, 거리를 매웠던 자전거들은 자동차로 변해서 8차선 도로가 막혔다. 다시 중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여 나는 한국에 다시 적응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