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 있는 한두 식품 생산라인에서 2주간 실습하기로 했다.
지인이 이곳에 가서 실습을 해보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의정부에서 타는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6시 40분에 숙소를 나섰다. 셔틀을 타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인사가 어색한 한국사회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둘째 날부터 현장에 투입되었다. 포장반에 배치되어 사수의 지시에 따라 정신없이 포장된 박스를 빠레트에 적재했다. 내게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은 김유신이라고 그의 흰 모자에 씌어 있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참죽에 납품할 1,011박스를 5시에 마무리했다. 정확히 1시까지 500박스를 포장했다. 적재는 7층으로 한 층에 17개씩 놓는다. 120박스짜리는 7층+1개, 130박스는 7층 +11개다. 그것도 유효기간을 찍은 인쇄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밖에서 보여야 하며 쌓은 것도 세 줄은 같고 한 줄이 달라 몇 번이나 다시 정리해야 했다.
조금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박숙희 블록장이 와서 박스가 뒤집어졌고, 인쇄가 잘못된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포장실에 계속 돌아다니며 박스를 챙기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작업하면서도 매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부드럽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한두에는 이런 작은 영웅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오늘 아침에 버스를 늦게 탄 것도 오늘 작업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몇 번이나 일어나서 알람을 놓쳤기 때문이다. 오늘 작업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부담감이 많았다. 반복작업, 고된 노동, 컨베이어벨트에 따라가야 하는 작업속도, 화장실 가야 할까 봐 커피 마시기도 두려운 작업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회사의 비전대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1년에 1회 이상의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이토록 고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업장에서 배웠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풀로 같은 실습생 차를 얻어 타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전직 미술학원 원장이라며 자신을 조심스럽게 소개했다. 노무현정권 때 학원사업이 망하고 빚을 진 이후에 닭고기를 분리하는 공장에서 몸으로 일해서 그 빚을 다 갚고, 일보다 더 힘든 직장 인간관계에서 억세게 7년을 버티며 몸이 망가져서 3년을 쉬었다고 했다. 육체로 일하며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딸까지 같이 한두에 입사했고 같이 근무하지만 동료들에겐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경기가 어려워서 개인사업이나 요식업종이 도산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어했다. 그런 와중에 한두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실습생들이나 직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사장이나 관리자를 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만나는 관리자들은 하나같이 사장님의 복제된 모습으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서 신입사원들의 눈에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식품회사에 일해 본 사람들은 한두에서 일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건 쉬운 편에 속한다고 했다.
특히 인간관계가 어떤 회사보다 좋고, 한눈에 봐도 관리조직이 짜임새가 있다고 했다. 나는 실습하는 2주 동안 일억 원의 가치를 배워 가기로 다짐했다. 회사를 회사답게 만드는 비결을 몸으로 배운다면 실습비정도가 아니라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얻을 것을 확신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 없는 실습생이었다.
배정받은 곳은 전처리실이었다. 장화를 신고, 수술하는 의사를 방불케 하는 손세척과 소독, 그리고 신발까지 내려오는 주방용 앞치마에 토씨와 고무장갑으로 무장하고 비장하게 전처리실로 들어갔다. 1시간이 지나서 깨달은 사실은 무능력 그 자체였다. 부추를 쏟아놓고 길이가 긴 것이나 이물질을 골라내는 자리에 섰는데, 흰 모자를 쓴 작업자들은 완전 선별기 자체였고, 3개월 된 직원도 무척 손놀림이 빠르게 움직였다. 난 속도도 느리고, 잘 선별해 내지 못했다. 블록장이 수시로 와서 박스에 가서 물건을 담는 일로 불렀다. 조금 있다가는 무말랭이를 씻는 작업에 불려 갔다. 전 처리실에서 작업하는 분들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속도와 동시다발적인 작업을 하는 여전사들의 능력 앞에서 난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됐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 연변과학기술대학 취업설명회에 가서 학생들을 모집하는 리크루트 책임자였고, 북경 KMC에서는 자동화설비의 컴퓨터를 책임지는 부장이었으며 중국어 전문가였다. 이젠 고등학생 알바보다도 못한 이름 없는 실습생이 된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는 양파를 가는 작업이 있어서 눈물을 닦느라 장갑을 벗어야 했다. 오후 작업은 중국에서 수입한 동결 부추 선별 작업이었다. 그리고 아무 때든지 그들이 부르면 달려가서 재료창고에서 박스를 나르고, 찜솥에서 무말랭이를 끝도 없이 꺼냈다. 김이 나서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4시가 넘어서 청소가 시작됐다. 리모델링을 방불케 하는 청소는 벽 닦기 바닥 닦기, 저장통 닦기 등의 순서로 그들은 전투적으로 청소를 했다. 바닥 닦는 밀대를 잡고 여기저기 다니며 청소하다가 눈치가 보여서 한쪽 벽에 붙어서 열심히 닦다가 5시 반이 되어 겨우 빠져나왔다. 새로운 문화에 가면 먼저 그들에게서 배우고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멀티작업에 능한 여전사들에게 나처럼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했던 뜨내기는 거추장스러움에 불과했다. 너무 주눅이 들어서 그들에게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의욕마저 잃은 하루였다.
느리게만 가던 시계도 결국 나를 불쌍히 여겨 실습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난 5시가 되기 전에 한두 식품을 탈출하듯이 빠져나왔다. 사장이 준 선물을 들고 회사 앞에서 카풀차량을 기다렸지만 탈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차라리 마을버스를 타고 가려고 걸었다. 마을버스로 가래비까지 가서 큰 버스를 타고 의정부까지 나왔다. 시간은 6시를 조금 넘었다. 무지막지한 현장의 작업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날은 외포장반에서 박스에 포장된 만두를 팔레트에 적재하는 작업을 무미건조하게 했다. 4시에 사장님과 미팅약속을 했다. 박준 과장이 배려해 준 것이다. 하루 종일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사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여전히 작업복차림으로 다른 약속이 있어 좀 늦었다고 인사를 대신했고, 작업복을 벗고 오라고 내게 말했다. 테이블에 앉았을 때 내게 차를 따라 주었고, 포장된 선물세트를 주었다. 나중에 집에서 풀어보니 설화수 남녀선물세트와 홍삼이었다.
나는 주저리주저리 한두에서 실습하면서 배운 것을 말했다. 그것을 듣는 그녀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온 00 교회에서 7년 동안 조용조용한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높은 뜻 00 교회에서 7년을 다녔고, 회사 근처의 작은 교회에 7년 동안 다녔다. 이제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보다 회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 베트남인들을 고용하며 일할 때 하나님이 일하심이라고 믿었다.
실습 첫날 오후강의에서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회사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가려고 했을 때 주님이 주신 마음이 “열심히 해봤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코피가 나도록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이었다. 나는 2주 동안 코피 나도록 일하고 진저리 치듯이 빠져나왔다.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다시 회사로 가면 7시 전에 카풀을 타고 나올 수 있겠지만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요즘 선교사나 목사님들은 “사”자가 너무 나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집니다.
이 말은 권위의식에 젖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모르는 위선자라는 의미가 있다. 사장은 나도 그렇게 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오히려 교만한 것은 아닐까…” 내가 유튜브에서 본 그녀의 스토리는 영업의 달인 수준으로 보험왕이었고, 만두판매왕이었다. 그녀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사장의 눈에는 내가 강제추방을 내세워 남들의 동정을 구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근버스로는 30분 거리였는데, 마을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한 시간이 걸렸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버스 창밖으로 어둠이 깔린 동두천 논밭이 지나갔다. 창밖으로 본 베이징 시내가 생각났다.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올라왔다. 사람들이 말하는 트라우마가 이런 것이려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