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샤대학은 시내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다. 학교를 한 바퀴 돌려면 1시간으로도 부족하다. 한국의 대학은 보통 언덕이나 산을 끼고 있지만, 닝샤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은 평지에 있다. 중국에는 23개의 성(省)이 있고, 자치구 5개, 직할시 4개, 특별행정구 2개가 있어 총 34개 성급 행정단위가 있다. 닝샤는 회족자치구에 속해있다. 각 행정단위에는 중점대학이 있어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 닝샤대학은 학생수 3만에 이르는 중점대학이고, 난 그 학교에서 공부했다.
유학생들은 보통 학교에 있는 유학생 기숙사에 살았다. 나는 별도로 시내(老城)에 살았다. 아침에는 중빠라고 불리는 녹색 미니버스를 타고 50분을 달려 닝샤대학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학생으로 중국어를 배웠다. 일본과 중앙아시아, 미국등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도 있어서 서툰 중국어로 대화하며 30대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나는 한국에서 전문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중국어를 2년 배운 후에는 닝샤대학 네트워크 엔지니어링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본과에서의 공부는 주로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유학생으로서 제일 어려운 것은 기말시험이다. 4지 선택형도 있지만 서술형 문제는 중국어를 암기하여 써야 하기에 무척 어려운 것이다. 본과에서의 내 전략은 반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공부 잘하는 회족학생 황차오를 만났다. 그는 내가 본과에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시험 볼 때 그의 요약한 노트가 도움이 되었고, 그가 사는 학교 기숙사에 자주 놀러 갔다. 중국 대학생들은 점심을 먹으면 웃옷을 벗고 1시간 동안 낮잠을 습관처럼 즐겼다. 덕분에 지금도 나는 점심에 30분간 낮잠을 자는 것이 좋다. 오후에 정신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4학년의 모든 과정을 마치면 졸업이지만 모든 과목에서 60점 이상을 맞아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만일 한 과목이라도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장이 아닌 수료증이 주어진다. ‘통신이론’ 과목은 나에게 만리장성이었다. 3학년 2학기때 수강과목이라 2번의 시험을 치렀지만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험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메모가 가능한 최신형 전자계산기를 샀다. 예상답안 단답형 문제를 저장했다. 커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 평생에 커닝하기는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늘 1등이어서 시험 때가 되면 친구들은 내가 제공하는 발가락 신호를 예의 주시했다. 고2 때는 자격증시험에 절박했던 선배의 대리시험까지 치러주었다.
만일 네가 나 대신 부기자격증 2급 시험을 치러주면 나이키 신발을 줄게
그때 나는 순진했었다. 그 말만 믿고 대리시험을 치렀고, 좋은 결과를 주었는데, 그 후로 입을 씻어버렸다. 선배인데 어쩌랴..
계산문제가 있어 계산기를 써야 하기에 감독관의 눈을 피하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드디어 시험시간이 되었다. 50분 시험시간에서 40분이 지났다. 앉아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시험지를 교수에게 제출하고 나갔다. 아직도 써야 할 문제가 5개나 남았는데, 정답으로 쓸 문장에서 몇몇 중국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계산기를 열고, 저장해 둔 문장을 검색했다. 비슷한 답을 골라 2개의 답을 썼다. 다음 문제의 답을 검색하는 순간 어느새 옆에 감독관이 와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왜 커닝하는지를 묻는 레이저광선이 느껴졌다. 진땀을 흘리며 내가 유학생이고, 이 과목에서 과락을 넘겨야 졸업할 수 있다고 간곡하게 해명했다. 감독관은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불쌍히 여기는 듯이 묵과해 주었다. 그때 내 나이는 교수와 비슷했다.
그 졸업장은 수년 후에 베이징에서 취업비자를 신청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취업비자 요건이 강화되어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취업비자가 가능하도록 규정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공부를 할 때나 해야 할 일이 앞에 놓여있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미루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해치워야 한다. 그 후에 반드시 이를 사용할 기회가 주어지며, 기회를 놓쳤을 때 두 번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커닝을 정당화할 수 없어 가급적 언급을 피하고 있다.
중국의 초등학교는 무조건 부모가 아침에 데려가고 점심에 집에 데려온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오후수업을 위해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저녁에 끝나면 다시 데려와야 하니 하루에 학교만 3번을 가야 하는 셈이다. 과거에 아이들의 유괴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교문에는 수위가 교문을 잠그고 단단하게 지키고 있어 개미 한 마리 얼씬할 수 없다. 학교에 들어가려면 수위를 통과하는 것이 교장을 만나기보다 어렵다.
아파트(仓上小区) 단지 안에 있던 창상소학교(仓上小学)는 늘 길이 막혔다. 좁은 2차선 도로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주민들도 익숙해져서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저녁에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들이 학교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에 줄을 선다. 반장이 선두에 서고 담임교사가 점호를 한 후에 줄을 맞추어 교문으로 나왔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와 비슷했다. 담장 밖에는 정해진 해산하는 장소가 있어 반장이 해산하면 그때부터는 부모의 책임이다. 부모는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간다.
중국인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이를 전담하거나 따로 이 일만 하는 사람을 고용하기도 한다. 나는 주로 아침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오는 일을 반복했다. 점심에는 아내가 전기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시켰다. 그렇게 아들을 초등학교 6년간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딸래미도 6년간 그랬으니 도합 12년을 등굣길에서 보낸 셈이다.
만일 한국에서 살았다면 아이들과 이렇게 살가운 추억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