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국생활 재적응

by 필톤

34세에 중국에 갔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50세 중년이 되었다.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눈발이 날리는 날씨에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어도 추웠다.


인생의 황금기를 중국에서 보낸 셈이다.

문제는 중국에서의 경력이 한국생활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추방되었으니 다시 중국과 연결할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50세면 퇴물이 되는데, 하물며 한국보다 문화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경험은 전혀 경력이 되지 못했다.


위기에 직면하면 믿고 의지할 만한 상대를 찾게 된다.

베이징 KMC에서 총경리로 근무했던 장이사에게 연락했다. 그는 인도 델리로 가서 회사를 창업했다.


PLC초보자는 인도에서 소용이 없어요.

여기서도 가르치면 금방 할 수 있는 값싼 인력들이 많습니다.

프로그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도는 중국보다 두 배 어렵다고 봐야 돼요.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네요.


장이사는 내 의욕을 몇 마디 말로 꺾어버렸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묵묵히 들었다.


실력을 검증할 수 없으니 무급으로 라도 실습하세요.


오사장을 찾아갔을 때 내게 말했다. 그는 KMC에서 측정장비에 들어가는 배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베이징 KMC에 가끔 와서 일을 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오사장에게 취직을 부탁하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내가 그를 도와주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오히려 그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PLC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게다가 나이도 많아서 20대 젊은 직원들이 꺼린다고 말했다. 차라리 무급으로 배운다고 하면 왜 거절하겠냐고 했다. 무급이란 경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베이징 KMC에서 부장으로 근무할 때는 실습생에게도 실습비를 주었는데, 하물며 이 나이에 무료로 배운다는 것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자신도 40대 초반에 국일(KMC한국본사)에 들어올 때 그렇게 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서 한국생활에 대한 감이 떨어지는 것은 여러 만남을 통해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한 아파트 단지에 같이 살았던 현석 씨의 흑역사를 들었다.

왕징에서 순의로 이사한 다음 현석 씨는 지인의 소개로 조선족 변호사를 만났다. 그의 말에 현석 씨는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도 한다.


북경에서는 그런 법률시장이 없습니다. 인원은 많고 할 일은 적습니다.


현석 씨는 한국에서 법대를 나왔고 베이징에서 법률 관련 서비스를 할 작정으로 중국에 갔던 것이다.

법무법인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나름 계획 세웠다.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여 법률서비스를 생각했지만 그것은 현지상황을 모르는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전철을 타고 베이징 시내 궈잔(国展) 근처의 코스타커피에 가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구인광고를 찾았다. 커피값 30위안이 아까운 시기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까맣게 탔을까? 그가 중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온 이후에야 내게 말했다.


가산동의 거리는 스산했다. 90년대 초반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이곳에서 직장 생활할 때는 그곳이 가리봉동이었다. 많은 봉제공장과 중소기업이 많았다. 가리봉동에서 가산동으로 바뀌었고 공장도 모두 사라졌다. 흐린 하늘에 눈이 조금씩 내렸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북경에 있을 때 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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