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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년 Feb 08. 2022

ITP 투병기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특별한 나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참 특별했다.

세살 때 특발성 혈소판감소성 자반증(ITP) 진단을 받아서 우리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했다.


대부분은 급성으로 수개월 뒤 호전이 되는데 나의 경우에는 만성이 되었고, 우리 부모님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병원 생활을 자주 했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론,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린 친구들과 종종 같은 병실을 썼고 그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이다. 나혼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때문에 넌 운 좋은 줄 알라는 말을 몇번 들었다. 그 친구들은 다 머리카락이 없었다. 나는 한번도 머리를 민 적은 없어서 유일하게 다른 모습이었을거다.


가끔 병동에서 링거 폴대에 매달려 복도를 누볐던 기억이 난다. 운 좋을 땐 휠체어를 얻어 부모님께 밀어달라 하기도 했다. 또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는 행위를 너무 좋아했기에 내 병상 옆에는 캔 음료수가 줄 지어 서있었다고 한다. 그 땐 어린이가 사용할만한 휴대폰도, 태블릿도 흔하지 않아서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답답한 곳에서 지냈을까 싶다.


나의 어릴적 사진들을 보면 항상 다리에 보라색의 커다란 멍이 있고, 그 멍을 가리고자 주먹만한 반창고를 붙여놓았더라. 어린 마음에 가리면 된다고 생각했나본데 더 튀었다.


4-5세쯤 사진은 얼굴이 터질것만큼 빵빵해져있는데 스테로이드 치료를 해서 그렇다고 한다. 스테로이드 치료는 엄마의 반대로 다행히 길게 하지 않았으나, 그 잠깐의 치료만으로도 부작용이 심했다. 10살도 안된 아이가 골다공증이 생겨서 장거리 여행을 갈 때면 엄마가 항상 다리를 주물러줘야 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혈소판 헌혈도 많이 받았다. 주로 아빠에게서 받았는데 그 힘든 것을 계속 하는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번은 작은 외삼촌의 체대 동기들이 우르르 와서 헌혈을 해줬는데 내가 그게 몸에 맞지 않아 면역반응이 심했다고 한다. 결국 다시 아빠의 혈소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혈소판 수치는 심할때는 5000, 보통은 20000 언저리를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면역 글로불린을 맞은 것도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치료는 링거를 통해서 받았으므로 항상 그 고통에 짜증을 냈던 나. 지금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힘든 가족들 앞에서 짜증 좀 내지 말걸 싶다가도, 그 어렸던 나로 다시 돌아간다면 짜증을 안 낼 자신이 없다.


시도때도 없이 코피가 나서 자다가 피 냄새만 맡으면 5초만에 일어나 엄마 아빠 방으로 달려갔다. 내가 침대 옆에 말 없이 서있으면 부모님은 주무시다가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셔서 나를 돌봐주셨다무조건 한번 나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3시간 정도를 지혈해야 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가 잠을 잘 못 자고 예민해진 것 같다.


한번은 코피가 너무  멈춰 응급실에  적이 있는데 괴롭다고 울어대니 눈에서 피눈물이 나왔다. 살면서 말그대로 진짜 피눈물흘려본  있는 사람이 많으려나..


살아있는게 기적이라는 소리를 살면서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고, 항상 아픈 너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신 주변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로 보답해야한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살았다. 친척들이 모이면 항상 “00이는 요즘 몸은 어떠냐? 이 애물단지야. 얼른 나아야지..”라는 소리만 들었다

공부나 외모 지적을 받을 틈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해야하나?


교회를 가면, “00이구나~ 우리가 너를 위해 매주 기도 많이 하고 있단다.” 하시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그렇게 교회와 병원에 나를 모르는 분이 없었다.


학교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발치할때면 수혈이 필요해서 일주일 간 입원을 했다그런 식으로 수업은 결석과 조퇴를 밥먹듯이 해야했고, 항상 콧구멍에 들어갈 사이즈로 탈지면 말아둔 것을 지니고 다녔다. 그때 내 별명이 코피였다. 또 체육시간에는 항상 열외였다. 사소한 체벌도 친구들과 함께 받지 못해 괜히 눈치가 보였다. 태권도 학원도 못 다녀보고 그 흔한 인라인 스케이트도 타보질 못했다. 몸에 무리가 갈까봐 성적 관리 잘 해주기로 유명한 영어 수학 학원은 다니질 못했다.


처음 생리를 했던 15살, 생리대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변기에 앉아 있었고 거의 한달 가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과다출혈로 쓰러져서 119에 실려갔다. 그 와중에 구급차가 신기했던 나.. 친구들에게 구급차 탄 것을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길로 비장을 제거하고 지금은 혈소판 수치가 정상을 유지하고 있으나, 1년에 한 번 소아과에 가서 “애기 엄마 몸무게 말고 애기 몸무게를 알려주세요” 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혈액검사를 받고 있다. 나를 봐주시던 의사선생님은 너무 나이가 드셔서 은퇴하시고 이제는 제자분께서 나를 담당하신다. 31살이나 먹고 소아과에서 호기심 가득 담긴 시선을 받고 이런 저런 소리 듣는게 정말 수치스러웠기에, 내년부터 성인 진료과에 넘겨주시기로 하셨다.


중학생때로 기억하는데, 국가에서 관리하는 난치병 학생 대장에 등록이 되어서 책을 받은 적도 있다. 제목이 ‘희망’이었던가? 받고는 뭘 이런걸 주냐며 피식했던 기억이 난다. 주는 거 감사하긴 한데, 받고나서 든 생각은 ‘나 정말 이 정도로 아픈 애야? 내가 희망을 가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인가?’ 였다.

(예.. 이거 제안하신 분 뉘신지? 역효과가 나는 듯 합니다.)


나의 유년시절엔 항상 하면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내 마음 속엔 ‘왜 나만, 왜 나에게만..!!’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이모는 내가 볼멘소리를 하면, 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나도 예수님을 찾게 하기 위해 병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예수님이고 뭐고 아무도 믿지 않지만 어릴때는 밤마다 정말 기도를 했다. 제발 건강해지게 해주세요. 우리엄마 우리아빠, 내 동생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고.


지금은 그 기도가 얼추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장육부 중 하나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고, 혈소판 수치는 정상이 됐으며 예방주사를 착실히 맞아야 하는 것 외에는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신체 상태라 느끼고 산다. 또 우리 가족이 돈은 많지 않지만 누가봐도 화목하고 단란하다.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본 한 인강 강사님이 말씀하셨다. 시험에 합격하면 시험 준비기간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고.

나도 살아 남았으니 그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면 남들이 못해본 경험 했다.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딨겠어? 어떤 어려움이든 극복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꼰대 같지만 슬픔과 불행 덕분에 행복이 더 극대화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도 돌아간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행복을 덜 느끼는 사람이어도 좋으니, 적어도 내 어린 시절에 ITP가 다시 나타나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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