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시쯤이었다. 원래는 C-Level에 리뉴얼 시연회가 토요일 예정이 되어있어서 바쁘게 데모 준비를 하던 고객사는 갑자기 오늘로 변경되었다고 목요일 밤늦게 연락을 주었다. 조금 이르게 출근을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그래도 다행스럽게 사전에 많이 준비가 되어있어서 두 번 손 안 가고 반영만 되면 더 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주섬 주섬 핸드폰의 알람을 맞춰놨다 "오전 07시 30분 - 긴급", 사실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는데, 계절이 바뀌어 해가 짧아져서 이불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인간의 본능이랄까, 여하튼 큰 이슈 없이 데모 준비를 오전에 마친 후, 오후에 보완점 하나 보강을 한 다음 들었던 말이었다.
"저는 먼저 나갑니다"
나의 눈과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말이었다. 나의 남은 시간을 봤다 "박종화 님, 잔여 업무시간 4시간 39분" "아이, 15분이나 남았잖아" 15분 동안 하릴없이 화장실도 가고, 물도 마시고, 업무 정리도 하고 동료 B에게 인사를 했다. "혹 문의사항 오면 바로 연락 줘요, 주변에서 산책할 거 같아요"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이른 퇴근을 하게 되었다.
"원래 당연하던 것들"
예전에는 일찍 퇴근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율 출근제'가 도입되면서 삶의 만족도가 많이 올라갔다. 나의 스타일처럼 "할 때 빠짝, 쉴 때 쉬자"를 눈치 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요 근래 업무가 많고 수시로 대응을 해야 하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일찍 가질 못하고 있었는데, 고객사에서 더 이상의 일이 없을 거라고 먼저 말을 해줘서 참 고마웠다. '당연한 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새삼 이 따스한 오후의 햇볕이 반가웠다.
"주변은 이미 알록달록"
회사 주변에 장미아파트를 자주 걸어 다니는 편인데, 오늘도 점심 먹고 한 바퀴 돌았던 산책 코스가 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가 봉인하기 귀찮아서 안 가지고 나왔었는데, 주변에 자주 보던 곳, 가봤던 곳들도 이미 가을을 온전히 맞이하고 있었다.
오토바이 마저 은행나무와 어찌나 이뻐 보이던지
욕한 것은 아니다. 옛날 아파트의 촌스러운 동 표시는 아날로그 감성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잠실중학교와 장미아파트의 노란 풍경들 이였다.
빛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그다음 행선지를 선택해야 했다. '도심으로 갈까? 아니야 아직 내 왼쪽 발이 조금 아파' 요새 또 왼쪽 발 통증이 재발해서 오래 걷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나의 휴식시간을 그냥 보내기엔 아까워서 자연스레 올림픽 공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모든 빛이 예뻤다. 노랗고 깨끗했던 그날의 빛
"피곤했었나 보다, 종화야"
올림픽 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만끽하러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내 취미가 사진이다 보니, 컨슈머 사진기를 들고 조명 엄브렐라를 들고 이동하는 사진가와 예쁘게 한껏 꾸민 모델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나도 언젠간 해볼 수 있을까?" 하면서도 '사람'에게 아쉬운 말 잘 안 하는 나의 성향과, '인물사진 결과물'에 대해 안 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함께 들다 보니 자연스레 내 관심에서 인물사진이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하늘, 나무, 건물, 카페와 같이 정지된 피사체가 더 편하고 좋다.
가을을 만끽하며 걷는 단풍객들
저 멀리 핑크뮬리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모델과 사진가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요새 빠져 있는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고 싶어졌다. 최근 들어 태블릿을 이용하여 전자책을 많이 읽고 있는데,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책이 가장 재밌었고, 그다음으로는 건축학 교수 '유현준' 씨가 쓴 책 들이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재밌게 보고 있는 책들이다. 바람이 살랑살랑, 오후 늦은 따스한 빛이 공원 전체를 감쌌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더욱더 붉게 물 들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 캠퍼스의 정의는...." 사실 앉아서 책을 읽기엔 너무 피곤했던 거 같다. 잠을 청하기 위한 예비동작이 아니었을까? 곧 스르르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바람도 좋고, 지저귀던 새들의 노래, 따스한 햇빛이 너무너무 좋았다.
나를 위해 준비되어있던 빨간 의자, 이 곳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30분쯤 잠을 잤을까? 약간의 추위를 느껴 잠에서 깼다. 자기 전까지 기억나던 한 가족의 인기척도 없었고, 나 혼자 오후의 빛을 잃어버린 스산한 공원에 앉아 있었다. 점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태블릿을 가방에 집어넣고 주섬주섬 일어나 집으로 가는 참이었다. "많이 피곤했구나, 종화야, 좀처럼 밖에서 못 자는 애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스로를 억누르지 말아라"
제목에 적은 Margin과 Padding이 이때 생각이 났다. 둘 다 여백을 처리하기 위해 지정하는 화면 명령어인데, Margin은 내 콘텐츠를 기준으로 '외부'와의 간격을 뜻하고, Padding은 내 콘텐츠 기준으로 '내부'와 간격을 의미한다. 나의 그동안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외부'에서 발의된 많은 이슈 탓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억누르고 거리를 두던 '내부'에서의 인내도 있었을 것이다. 이 둘의 조화를 조금씩 더 맞추어 나가면 내 안의 감정 변화의 폭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 주 상담 때에는 종화 님, 그 당시의 감정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요" 이번 주 상담 선생님이 이야기해주셨던 내용이었다. 그래도 지금 느끼는 생각은, 외부에서 오는 이슈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내부'에서 오는 강박감과 스트레스는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해본다. 물론 이루어 지기는 분명 어려울 것이다. 한두 번 해본건 아니니까...
"그래도 오늘 하루가 졌다"
오늘 하루가 다 갔다. 오늘 하루가 졌다. 해는 예쁘고 강렬하게 지면서 마지막 빛을 나에게 선물했다. 조금이라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시간을 많이 나에게 선물해야겠다. '책도 많이보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주말엔 가족들하고 놀아주면 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살짝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오늘도 졌지만, 내일은 이길 수 있겠지,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이어가며 그렇게 나의 2021년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소중했던 하루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