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Magnolia kobus
어렸을 때부터 너무 당연하게 목련을 봤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어딜가든 목련이 흔해서, 오히려 벚꽃 축제는 많지만 목련 축제는 적은만큼 너무 쉽게 보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희미한 장면들 속에서 목련은 언제나 조용한 봄의 입구에 있었다. 아직 나무들은 겨울의 모습 그대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목련만 잎 하나 없는 가지 끝에 도톰하고 부드러운 은색털을 감싼 꽃눈을 피어올린다.
흰 목련은 그저 피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계절을 바꾼다. 대단한 향을 내는 것도 아니고, 눈부시게 화려한 것도 아닌데, 가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어떤 고요함이 있다. 바람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두둠한 꽃잎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은 식물에게나 사람에게나 특별하다. 피는 순간은 짧지만 고귀한 탄생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고, 식물이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하나의 심볼이 된다. 식물에게 이러한 ‘꽃’이라는 기관이 처음부터 있었겠지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꽃의 등장은 식물 진화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목련의 역사는 꿀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련 속의 나무들은 백악기 후기에서 부터 그 존재가 확인이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목련을 통해 가장 오래된 꽃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꽃잎과 꽃받침의 구분이 없는 여섯 장의 화피, 그 중심을 차지한 수많은 수술과 암술의 나선 배열은 ‘꽃’이라는 개념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그 흔적으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목련은 벌보다 먼저 나타난 곤충, 딱정벌레에 의지해 수분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향기롭지만 꿀은 없다.
‘목련(木蓮)’이라는 이름. 말 그대로, 나무 위의 연꽃이다.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은 청정의 상징이지만, 맨가지 위에서 피어나는 목련은 절제된 고결함에 가깝다. 환경은 달라도 그 기품은 닮아 있다. 타국의 문화 속 목련도 비슷한 감정으로 읽힌다. 중국에서는 순결과 품격의 꽃, 일본에서는 봄을 알리는 전령. 미국 남부에서는 인내와 영속의 상징으로, 한국에서는 모성애와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목련의 언어를 탄생이라고 잡아봤다. 봄의 시작을 알리며, 존재 자체로 꽃의 기원을 담고 있는 역사와 그 상징적인 이름까지. 무엇이 시작된다 라는 것, 태어나고 피어나고 또 새로운 씨를 퍼트리는 순리의 근원이 목련 안에 담겨있다.
1년에 한 번,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축하받는 날, 바로 생일이 있다. 카톡으로 기프티콘 주고받는 문화가 생기면서 예전에 비해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훨씬 간편해졌다고 말하지만 진심 어린 축하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 누군가의 축하받을 일이 또 다른 이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 순수한 축하의 마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 ‘탄생’이라는 단어에는 때 묻지 않은 축하의 의미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이제 거리에는 목련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벚꽃보다는 좀 더 길게 감상할 수 있는 목련을 통해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자신이 진심을 담아 축하해주고 싶은 대상은 누구일지, 또 나의 탄생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목련의 봄과 나의 생일에는 난 이미 많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식물계(Plantae)ㆍ피자식물문(Angiospermae)ㆍ쌍떡잎식물강(Magnoliopsida)
목련목(Magnoliales)ㆍ목련과(Magnoliaceae)ㆍ목련속(Magnolia)
목련 속에는 200여개의 종이 있으며, 이른 봄에 흰색(백목련), 연분홍 또는 자주빛(자목련)의 큰 꽃이 피는 종, 4,5월에 개화하는 함박꽃나무와 태산목 등 다양하다.
키는 약 3~5m 이상 자라기도 하며, 일반 가정이나 공원에서 관상용으로 많이 식재된다.
국내에서 노지월동이 가능하며 비교적 관리가 쉬운 낙엽성 교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