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보다 먼저 온 자리를 믿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내 말은 느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말하면, 나는 잠깐 멈췄다.
내 안에서 뭔가 움직였지만,
그게 말이 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예전엔 그걸 답답함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그 조용한 간격이 고맙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게 되었다.
결핍에 싸여 있던 시절에는 말이 앞섰다.
살기 위해,
설득하기 위해,
나를 부풀리기 위해.
말은 벽처럼 단단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지금은 말보다 숨이 먼저고,
감각이 먼저고,
몸이 먼저다.
이제는 목소리를 고르기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먼저 살핀다.
어딘가에 닿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자연스레 흘려보낼 수 있는 말.
억지로 뽑아내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말.
그런 말이 아니면
굳이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안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너무 이르지 않게.
정제되지 않아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
그 안에 말이 있다면,
언젠가 그것이 나를 통해
자연히 흘러나올 것이다.
나는 흐름을 막지 않기로 했다.
가르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다만
“이건 내가 지나온 자리야”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만
말하려 한다.
말보다 먼저 온 자리.
그 자리를 믿는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마 언젠가
이 자리에서도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다.
그땐 그 문을 지나
또 말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