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으로의 초대

낙태 생존자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의 성장기 10_시즌1 끝.

by 미안

연석이는 수업 중 자주 멍해진다.

그때 뭔가를 질문하면 100% 이상한 답변이 돌아온다.

곱하기 문제를 물어보는데 빼기 이야기를 하고, 분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소수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집중해야지, 다른 생각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자, 여기 다시 보자 연석아"라면서 아이를 어떻게든 공부에 다시 집중하게 하기 위한 시도로 진땀을 뺐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어느 날

수학 문제를 열심히 설명하다가 연석이의 눈빛이 멍해지는 것을 또 감지했다. 눈빛은 멍하니 초점이 흐려져 가고, 입은 점점 벌어진다. 연석이의 두 팔은 뒤로 젖혀지면서 점점 흉곽을 넓게 펴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리게 해서 다시 공부에 집중하게 환기시켜야 하는데, 잠시 그냥 둬보기로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이 작은 머리로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관심이 연석이에게로 쏠리자 연석이의 호흡이 점점 깊어지고, 고개가 살면서 떨구어지는 것까지 느껴진다.


공부를 시키느라 집중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이 쯤되면 슬슬 나도 화가 올라오기 시작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연석이의 움직임은 마치 딱딱한 번데기에서 벗어나 비상을 꿈꾸기 위해 꿈틀대는 나비의 몸부림 같았다. 아름다웠다. 자기를 옭아매고 있는 육체의 굴레, 학업의 굴레,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지금 현재 하기 싫은 것을 참고 해내야 하는 인내심 등으로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꿈틀거림으로 저항하며 탈피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물론 아직은 그 힘이 미약하여 더 강력한 번데기 속 꿈틀거림에 그치지만 점차 그 움직임은 커지고, 강해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완전변태를 통한 나비가 되겠지.




"연석아,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환기를 시키며 질문을 던져본다.

"선생님, 이 숫자들을 피아노 건반으로 하나하나 두드려 때려서 날려 버리는 생각을 했어요"

엥?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화가 난 건가? 혹시 연석이가 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을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연석이는 피아노 작동 원리를 배웠다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치면 그 힘이 그대로 해머로 전달되고 그 해머가 피아노 줄을 때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연석이는 제법 신나 하고 재밌어했다고 한다. 아마 아이는 너무 하기 싫은 수학 문제집을 앞에 두고 책 속의 숫자를 하나씩 해머로 날리는 상상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가슴속에서는 연석이가 수학을 싫어하는 만큼 온몸의 힘을 다해 강하게 피아노 건반을 쳤을 때 해머가 피아노 줄을 때리는 강하고 웅장한 피아노 음색을 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녀석~"

머리를 한 번 털어주고, 쉬는 시간을 주자 신나서 교실 문을 나선다.




공부에서 벗어나 시선을 아이에게 두니 아이의 세계가 궁금해졌고, 아이는 기꺼이 자신의 세계로 나를 초대해 줬다. 그리고 그 세계에 함께 동참시켜 준다. 아이와의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짐짓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흐뭇해졌다. 아이와 나의 라포의 성장이다.


아이의 상상력에 나의 상상력을 얹어 함께 연석이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너무 명확해서 아이의 세계에 완전히 다다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 문을 기꺼이 열어 나에게 그 속을 보여준 아이, 그리고, 하기 싫은 수학 문제집 속 숫자들을 피아노로 날려버릴 정도의 강한 포르티시모의 선율을 잠시라도 함께 느껴볼 수 있게 해 준 것으로도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나의 눈은 점점 연석이를 바라보고, 연석이는 자신의 세계에 나의 한 발을 들일 수 있게 허용해 준다. 나의 마음은 점점 연석이를 허용하고, 연석이는 나라는 어른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낯선 관계로 만난 연석이와 나는 점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물론 이렇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속 달려가야 한다. 몇 개월 남지 않은 중졸 검정고시는 그저 시작일 뿐일 것이다. 지금 연석이가 보여주고 있는 작은 상상의 꿈틀거림 역시 출발점일 뿐일 것이다. 아이의 천재적인 피아노 실력도 앞으로 피나는 노력이 불가피한, 갈 길이 먼 천재성에 불과하다.


결국 나비가 될 때의 연석이의 성장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연석이의 성장과 함께 나의 마음의 자리도, 나의 기다림의 자리들도 커져갈 것이다.

그 미래 진행형의 성장을 기대하며 오늘의 마침표를 아쉽게 찍어본다.




- 시즌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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