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이 사라졌다.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낙태 생존자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의 성장기 6_숙제

by 미안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한 지금의 연석이.

vs

학교를 다니던 어제까지의 연석이.


이 두 연석이는 상황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아이다.

그냥 아이를 둘러싼 틀이 바뀐 것뿐이다.


실제로 아이는 변한 게 없다.


뭔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도 없고,

학교를 그만두는 날 왈칵 눈물을 쏟은 것 말고는 여전히 덤덤하고, 여전히 숙제를 하지 않는다.

숙제를 잘하기로 꼭꼭 약속을 하고, 앞에서는 대답을 잘했다가도 또 숙제를 안 한다.

한 번 수업에 겨우 2시간인데, 숙제 점검에 채점, 오답 정리까지 하다 보면 다음 수업 진도를 못 나가기 일쑤다. 미리미리 숙제를 해서 사진을 보내라고 이야기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뭔가 달라졌다.


뭔가 비장하고, 뭔가 엄청난 책임감이 짓누른다.

여전히 숙제를 안 하는 아이에 대한 반응이 예민해지고, 독촉하게 되고, 불안해진다.

효율성 추구와 목적지향이라는 옛 업무 패턴이 다시금 슬그머니 나를 지배하려고 한다.

내년 4월에 검정고시를 보고 졸업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숙제를 안 하고, 진도를 못 나가면 중학교 2, 3학년 과정을 하기가 어려운데,

아이를 지켜주던 학교라는 틀도 없는데, 이렇게 수업도 못 따라오면 어쩌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학교를 다니던 연석이에게 꽤나 후하고, 기다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던 어제의 나는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아이를 당기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순순히 끌려 올리 없다.

아이도 팽팽하게 자기 입장에서 나를 당긴다.

나를 당기는 아이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도 힘을 더 주게 된다.

물리적으로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아이와의 줄이 점점 팽팽해진다.

긴장감은 더해간다. 말도 거세진다.

어느새 아이를 염려하고 아끼고, 잘 성장시키고 싶었던 본질은 사라진다.

'아이에게 질 수 없지, 아이를 어떻게든 숙제를 시키도록 해야지'라는 생각만 남는다.


줄이 끊어졌다.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연석아, 연석이가 이렇게 선생님 안 따라오면 선생님은 연석이를 가르칠 수가 없어. 연석이가 더 잘 따라가고, 연석이를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에게 연석이를 맡길 수밖에 없어"

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아이의 힘이 스르르 빠진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사실, 아이는 흔하디 흔한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이에게 선택권은 없지 않은가.

더 좋은 선생님, 더 나은 선생님을 선택할 힘이 없지 않은가.

내가 이 아이를 맡아보겠노라고 결심하고, 봉사로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


줄을 놓아버린 아이는 이내 시무룩해진다.

나 역시 줄을 잡고 있던 손이 부끄러워져 슬그머니 줄을 내려놓는다.

줄다리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게 좋아요"


갑작스러운 고백이다. 당황스러웠고,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 어린아이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발 물러서서 아이를 기다려주고, 품어주겠다던 나의 결심과 오랜 기도는

잠시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엄습하자 이내 상처와 아픔만 남기고 말았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내가 이 아이를 맡겠다고 했을 때, 이 아이의 공부와 성적, 검정고시 합격을 위해 맡겠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아이가 검정고시를 제 때 합격하는 게 내 목표였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더 기다려주고, 더 버텨주고, 더 품어주자.

덜 불안해하고, 덜 초조해하고, 덜 걱정하자.


한 아이를 어떤 식으로 품는다는 건... 이렇게 여과 없이 내가 투영되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team-competing-tug-war.jpg


하지만,

이번 줄다리기의 성과는 있었다.

아이가 생각보다 나를 참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연석아, 나도 네가 참 좋다!!

우리 서로 반대방향에서의 줄다리기는 이제 하지 말자.


선생님이 네 뒤에서, 같은 방향에서 줄을 당겨줄게.

너를 좌절시키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너를 무너뜨리려는 세상의 여러 소리들로부터

너를 낙담시키는 네 내면의 걱정과 불안들로부터

당당히 맞서서 함께 힘을 모아보자.


연석이와 내가 같이 한 팀이 되어 싸울 줄다리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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