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36편)

숲은 말하지 않았고, 바람은 길을 잃지 않았다

by 아르망

찢겨 나간 잎사귀들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바스락 내려앉은 뒤에도,
숲은 한동안 완전한 침묵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꺾인 줄기가 칭얼대듯 가늘게 몸을 비틀었고,
놀란 잎맥들은 제자리를 찾느라 낮게 몸을 뒤척였지요.


마치 숲에 들어온 이방인들을 품에 안고서,
그 낯선 존재의 흔적을 천천히 되새기는 것처럼.


모든 소음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이제야 ‘정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

숲의 숨결 깊숙이 배어든 곳에 내려앉았을 때—


"톡."

찢어진 잎사귀 조각 하나가

찌그러진 루인의 투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깃털처럼 가벼운 기척은,

배려심 많은 침묵이 루인의 안부를 묻기 위해 건네는

조심스러운 노크 같았지요.


“으윽…”

뒤늦은 통증이

이제야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밀려오자,
루인은 숨통을 조여 오는 감옥을 부수듯

찌그러진 투구를 낚아채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투둑, 툭, 바스락."

차가운 쇠붙이가

부드러운 잎사귀 위를 뒹구는 소리.

그 둔탁한 울림은, 고요했던 숲의 밑바닥을

요란하게 흔들어 깨웠습니다.

멈춰 있던 시간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는 신호처럼.


루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

아득히 높은 곳.

그들이 온몸으로 뚫고 내려온

수백 겹의 초록색 터널 끝자락에,

밤하늘이 깨진 유리 파편처럼

서늘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죽음의 경계이자,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까마득한 높이.

그 압도적인 거리감이 두 눈에 아득하게 쏟아져 내리자,

루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단 하나의 의문.


'나만… 깨어난 것인가?'

루인은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미친 듯이 주변을 더듬었습니다.

흙바닥을 긁던 손끝에 닿은,

축축한 잎사귀 더미 속에 파묻힌

작고 부드러운 감촉.


"릴리…!"

루인은 으깨진 풀무덤 속에서

그녀를 꺼내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그의 단단한 팔 안에 안긴 릴리의 몸은,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잎사귀들에 긁힌 그녀의 뺨 위로

파르라니 식은 달빛이 내려앉아 있어,

루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확인.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루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

릴리의 코끝과 가슴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습니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조차 방해가 될까 봐 숨을 멈춘 채.

"릴리…? 제발, 릴리…."


대답 대신, 그의 품 안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 하나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 작디작은 움직임이,

루인의 심장에 끼어 있던 살얼음을 단숨에 깨뜨렸지요.


"후우우…."

참았던 숨이 둑 터지듯 새어 나왔고,

멈춘 듯했던 루인의 심장도

그제야 다시 쿵, 쿵, 제 속도를 찾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식어가는 차가운 밤의 대지 위에서

유일하게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릴리의 체온은 굳어 있던

루인의 가슴을 허물며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콜록, 콜록!"

릴리는 기침을 토해내며

루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습니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만큼 거센 그 악력.

그 감각 하나하나가,

둘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아프게,

그리고 달콤하게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릴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초점이 맺히지 않은 흐릿한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차오르더니,

그녀는 마치 공기 속에서 먼저 손을 내민

무언가에 이끌리듯,

허공을 향해 가느다란 팔을 뻗었습니다.


루인은 릴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조용히 시선을 옮겼습니다.


"저것… 봐요."

릴리의 목소리는 비밀을 속삭이듯 낮았지만,

루인의 귓가에는 천둥보다 더 또렷하게 박혔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끝내 참지 못하고 터져 오르는 ‘해방’.

땅속 깊은 감옥에 사슬처럼 묶여 있던 바람이

드디어 풀려났던 것입니다.


억눌린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그 육중하던 감시탑은

마치 무게를 잃은 죄인처럼 허공으로 튕겨 올랐습니다.

마치 ‘무게’라는 세상의 법칙을 도둑맞은 것처럼.


"우르릉— 콰아앙!!"

영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만 같았던 거대한 그림자가

붉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 속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폭풍이 휩쓸고 간 그 빈자리를,

거짓말처럼 전혀 다른 결의 바람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동쪽 계곡 어딘가, 깊은 옹달샘에서 방금 길어 올린 듯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새벽바람이었습니다.


그 청량한 기류는 부서진 탑의 잔해 사이를 씻어 내리고,

수백 겹의 잎사귀 지붕을 관통해

숲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숲의 숨통을 조이던

비릿한 쇠 냄새와 묵은 기름때가 씻겨 내려가고,

그 자리에 알싸한 솔향기와 축축한 흙내음이

푸릇하게 차올랐습니다.


꽉 막혀 있던 땅의 혈관이 뚫리며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해방의 숨결.

마치 산 전체가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던 숨을,

마침내 '후우' 하고 한 번에 내쉬는 것만 같았지요.



릴리가 숨죽인 채 속삭였습니다.

“산이… 다시 숨 쉬고 있어요.”


루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너무도 달콤해서,
이유도 모른 채 눈가가 뜨거워졌습니다.


“… 그래.”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숨을 고르듯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가… 해냈어.
정말로 바람을 자유롭게 풀어줬어.”


그 말이 끝나자,
숲 속 깊은 곳에서 낮은 울림들이 뒤늦게 따라 나왔습니다.

나무들이 서로의 몸을 스치는 소리,
젖은 흙이 자리를 고르며 가라앉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조심스레 길을 찾는 숨소리.


그 모든 것이 겹쳐져,
이곳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청명하게 말해주고 있었지요.


릴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습니다.
루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녀의 어깨가 아닌

지나가버린 공기만을 붙잡고 멈췄습니다.

괜찮다는 듯,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팔을 천천히 벌렸지요.


해방된 바람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칼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고,
그 순간—
땀과 흙으로 얼룩진 얼굴 위에
아이처럼 맑은 웃음이 번졌습니다.


“들려요, 루인?”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산이… 다시 노래하고 있어요.
고맙다고.

꽉 막혀 있던 목구멍을 틔워 줘서,

이제야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있어요.”


루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귀에는 여전히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 소리 너머에서 무언가 묵직한 박동이
자신의 가슴 안에서 함께 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요.


“그래…”

그는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렸습니다.

“나도… 들리는 것 같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의 심장 또한 아무 경계 없이,
제 박동을 되찾고 있었으니까요.



“그나저나, 루인.”

감격에 젖어 있던 릴리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루인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굳혔습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본능처럼 칼자루를 찾으려던 찰나—

릴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투구 벗으니까 인상이 확 피네?”

“… 뭐?”

“그동안 이 멀쩡한 얼굴을
그 답답한 쇳덩이 안에 숨겨두고 있었던 거예요?”


그제야 루인은
자신의 투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황급히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지요.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뺨에는 흙탕물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지만—

릴리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갓 껍질을 깐 햇과일처럼 싱그럽게 보였습니다.


“이거 봐요.
땀범벅이 되니까 꼭 햇볕에 잘 말린 흙냄새 같기도 하고,

고소한 도토리 냄새 같기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습니다.

“맨날 입구 없는 굴에 숨어 있는 두더지처럼 굴더니,
이제야 좀 말 통하는 남자 같네.”


툭.

그녀의 손가락이
루인의 콧등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냈습니다.

“……!”

루인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순식간에 붉어졌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크흠. 쓸데없는 소리.
투구는… 전사의 생명이다.”

“어유, 네네. 그 ‘생명’이요—”

릴리가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나뭇가지에 걸려서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거든요?”

그곳에는 찌그러진 투구 하나가
나뭇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람에 맞춰 우스꽝스럽게 흔들리고 있었지요.


“……”

루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 후.”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툭 풀었습니다.

그리고 릴리를 따라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습니다.


숲 속에 번져가는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

그것은 둘이 이곳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솔직한 생명의 소리였지요.



"가자. 우리의 보금자리, 밤의 숲으로."

루인이 릴리의 어깨를 조심스레 부축했습니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둘은 숲이 내어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느덧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칠흑 같던 어둠이 걷힌 자리로,

동쪽 하늘 가장자리부터 묽은 잉크가 번지듯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발에 밟히는 흙은 솜이불처럼 부드러웠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달콤했습니다.

모든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릴리가 루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떨어질 때..

루인, 비명 소리가 아주 우렁차던데요?"

"……크흠. 그건.. 사실 비명이 아니라 기합.."

"에이, 누가 들어도 '엄마야!' 하는 비명이던데?

마을 꼬맹이들이 알면

그 대단한 '강철 전사님' 체면이 말이 아니겠어요?"


릴리는 까르르 웃으며 루인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루인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지만,

귀 끝은 잘 익은 산딸기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꼬마들한텐 비밀로..."

"음, 글쎄요? 하는 거 봐서요."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웃더니,

슬쩍 루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돌아가면…

또 그 어두컴컴한 동굴로 쏙 도망가 버릴 건 아니죠?"

"……."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은 큰 떡갈나무 공터로 와요.

바람도 돌아왔으니 모닥불 주변이 시끌벅적할 거예요.

잘 익은 도토리 꿀물도 한 잔 사줘요… 그리고…."


릴리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발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차며 수줍게 덧붙였습니다.

"내 옆자리, 비워 둘 테니까."

"……."

루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습니다.

그는 멍하니 릴리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약속하지.

도망가지 않겠다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숲 속에는 분홍빛 기류가 섞인

맑은 웃음소리가 번져갔습니다.

지옥 같은 탑을 무너뜨렸고, 바람은 돌아왔습니다.

이제 함께 돌아가, 꿀맛 같은 음료를 나누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일만 남았다고,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날 밤,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바람은 오래도록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날 숲에서 풀려난 바람이

훗날 수많은 길 위에서

‘살아 돌아온 이유’로 불리게 되리라는 것을.


(다음 편 '입술 끝에 피어난 숲'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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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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