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37편)

입술 끝에 피어난 숲

by 아르망

검게 타버린 숲이 눈을 감자,

하늘은 그제야 회색 비를 놓아주었습니다.


모든 숨이 타들어 간 침묵의 자리.

비는 뒤늦은 위로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렀지만,

이미 검게 굳어버린 대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들의 울음도,

바람의 속삭임도 사라진 숲.

오직 굵은 빗방울이 진흙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이별을 세는 박동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벨라의 세상은 더는 버티지 못한 채
천천히 끝을 향해 기울고 있었습니다.


입안 가득 고인 늪의 독기는
수십 개의 미세한 바늘이 되어 혀를 찔러댔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쓰고 아린 진액은

그녀의 의식마저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흔들리고,
시야는 흐려졌지만—

벨라는 지금 눈을 감을 수 없었습니다.


잿빛 진흙 속에 파묻혀
체온을 잃어가는 바르크의 얼굴.

그 창백한 윤곽만이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초점이었기에.


‘안 돼… 이 작은 불씨가 꺼지기 전에…’


벨라가 머금은 입안의 꽃은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물방울처럼 위태로웠습니다.

거친 숨이 새어 나올 때마다,
차고 메마른 바깥공기를 감지한 꽃잎이
파르르 떨며 빛을 잃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이 숲의 숨결과 닿는 순간,
스스로를 지워버리겠다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건넬 시간은 없었습니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옮기는 그 짧은 찰나에도
이 연약한 생명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이 꽃을 온전히 바르크에게 전할 방법은 하나뿐.

공기가 스며들 틈조차 허락하지 않고,
입술과 입술로 세계의 문을 닫는 것.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진흙 바닥을 짚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에게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녀의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바르크의 감긴 눈꺼풀 위로 부서졌습니다.



벨라의 쓰디쓴 입술이
바르크의 얼음장 같은 입술에 닿으려던 그 찰나.

세상을 가득 채우던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떨어지던 빗방울은 허공에서 머뭇거렸고,
스치던 바람은 끝내 침을 삼켰습니다.


마치 세상의 시계가 태엽을 놓아버린 듯,
오직 두 사람 사이의 거리만이
남겨진 시간처럼 떨고 있었지요.


숨을 삼킨 채 바라보던 숲

그 사이에서,
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 하나가
툭—
진흙 위로 떨어졌습니다.


차가운 물줄기가 벨라의 뺨을 타고 흘러
바르크의 감긴 눈꺼풀 위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그의 차가운 입술에 닿는 순간.

바람은 완전히 멎었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는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느려졌습니다.

숲의 소리도,
회색빛이 섞인 공기도,
심장 깊은 곳에서 울리던 박동조차—

모두
그 짧은 거리 앞에서 멈춰 서 있었습니다.


남아 있던 것은
서로의 체온,
그리고
곧 무너질 입술 사이에 고여 있던
정적뿐.


바로 그때—

둘의 입술이 맞닿은 그 좁은 틈에서
초록빛이 피어났습니다.

벨라의 입안에서 죽어가던 꽃이
바르크의 숨결과 만나는 찰나,
마치 마지막을 미루기라도 하듯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만개했습니다.


흑백으로 굳어 있던 세계에
마치 단 하나의 색이 떨어진 것처럼.


빗소리도,
진흙의 냉기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이름을 잃었습니다.

오직
서로의 입술을 통해 오가는
뜨거운 생명의 박동만이
전부가 된 세상.


벨라의 숨결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바르크의 목덜미를 따라
초록빛이 천천히 길을 냈습니다.

죽음이 드리웠던 피부 아래에서
생명은 말없이
자신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었지요.


서로의 호흡이 하나로 얽히는 동안,
벨라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비워지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쓰고,
아프고,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는—

생명을 건네는 일.



모두가 숨 죽인 늪의 가장자리에서,
그 적막을 가르며
다급한 발소리들이 뛰어들었습니다.


“저기—! 저기 누군가 쓰러져 있어!!”


그들은 마을의 청년들과 대장장이 한스였습니다.

얼굴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고
옷자락은 불길에 할퀴인 듯 찢겨 있었지만,
카르의 군대가 물러났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한 이들이었지요.


몽둥이와 삽을 움켜쥔 채, 불길 속으로 사라진 바르크를
시신이라도 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들은 독기를 가르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발걸음이 늪의 가장자리에서
일제히 멎었습니다.

죽음의 회색빛으로 잠겨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바르크의 몸이
희미한 초록빛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아직은 이 숲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는 듯이.


“세상에…… 벨라 아가씨까지……!”

한스의 목소리가
고요한 침묵 사이로 갈라졌습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어서 옮겨! 아직 숨이 붙어 있어!”


그들의 투박한 손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서둘러
둘의 몸을 들어 올렸습니다.




따뜻하고 뭉근한 열기가
벨라를 감쌌습니다.

눈을 뜨자, 코끝에 익숙한 약초 냄새와
갓 끓인 수프의 구수한 김이
천천히 퍼지고 있었지요.


불에 그을린 냄새가 아닌,
살아 있는 냄새.


“여기는…”

벨라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눌렀습니다.


마을의 촌장 마고였습니다.

언제나 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은 사라지고,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눈물이 고여 있었지요.


“더 누워 있게.”
잠시 숨을 고른 뒤, 마고 촌장은 낮게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우릴 살렸어.”


벨라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마을 회관이었습니다.

불에 그을린 들보 아래,
부상당한 주민들이 서로의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지요.


누군가는 약을 달이고,
누군가는 죽을 떠먹이며,
아무 말 없이
자기 몫의 일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벨라가 깨어난 것을 알아챈 순간,
주민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덕분이에요.”

팔에 붕대를 감은 청년이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바르크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벨라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우린 숲이랑 같이 사라졌을 겁니다.”


마고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벨라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습니다.


“평생 이 숲에서 살았어도,
이렇게 다시 숨 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마고는 벨라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회관 한쪽에서는 그을음투성이 얼굴의 아이가
부모 뒤에 반쯤 숨어
벨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꽃잎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불에 타지 않고 남은, 초록빛이 살짝 도는 잎이었지요.

“이거….”


그때,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대장장이 한스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말없이 벨라 앞에 서더니,
커다란 손으로 모자를 벗어
가슴에 눌렀습니다.


“… 우린 숨어 있었지.”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였습니다.

“당신들이 싸우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고개를 들고
분명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 말에 회관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물러나고,

용기가 자리를 차지하는 그 울림.


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벨라는 곧 깨닫게 되었지요.

자신이 지켜낸 것은
한 생명만이 아니라,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 마을의 숨결이었다는 것을.



그때, 반대편 침대에서 거친 천이 쓸리는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있어야지!”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분명 힘이 실린 목소리. 바르크였습니다.

상체에는 피 묻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눈빛은 맑게 돌아와 있었습니다.


“바르크…!”

벨라가 울먹이며 다가가려 하자,

그는 한 손을 들어 제지하더니 먼저 침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주민들이 조용히 길을 터주자,

바르크는 성큼 다가와

벨라의 침대 곁에 주저앉듯 걸터앉았습니다.


“너 진짜…”

잠시 말을 고르듯 거친 숨을 몰아쉰 뒤,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습니다.

“너무한 거 아냐?”


바르크의 투박한 엄지가 벨라의 뺨에 남은 흙투성이 자국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그의 타박에도 벨라는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대꾸했습니다.

“네가 죽어가는데, 그럼 보고만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난 약초사야. 널 살리는 게 내 일이라고.”


그 말에 바르크는 헛웃음을 툭 터트렸습니다.

그는 상체를 조금 더 숙여

벨라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약초사라...”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만 입가에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습니다.


“원래 이 숲의 약초사들은 환자 하나 살리겠다고

불지옥까지 뛰어드나?

아니면... 그 환자가 ‘나’라서 뛰어든 건가?”

“그, 그건...!”

벨라의 말문이 막힌 틈을 타,

바르크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어졌습니다.


“근데 말이야...

치료법이 꽤 과격하던데?”


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산딸기처럼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어, 어쩔 수 없었어!

꽃이 공기에 닿으면 죽어버리니까,

입안에 보관할 수밖에...!”


“덕분에 말이지..”

바르크는 벨라의 변명을 느긋하게 끊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입안이 아직도 얼얼해.

독초를 통째로 씹어 먹은 것처럼 쓴맛이 가시질 않는군.”


짓궂은 말투였지만, 벨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부드러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바르크가 벨라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속삭였습니다.


“근데 참 이상했다.”

“......?”

네 숨결이 닿았던 느낌은..

그는 벨라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웃었습니다.

“그 지독한 쓴맛을... 단숨에 잊어버릴 만큼 달더라.”

벨라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비몽사몽 간에도 그 온기를 놓치기 싫어서...

억지로 삼켰어.

그토록 간절했던 네 숨결을 말이지.”


“바... 바르크...”

“그러니까 다음엔 말이야.”

그가 벨라의 손을 꽉 쥐며,

듬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약초 말고 그냥 해줘,

쓴맛은 빼고.”


벨라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여버렸습니다.

귀까지 새빨개진 그녀였지만,

바르크가 꽉 잡은 그 투박한 손만은...

끝내 놓지 않았지요.



“자자, 눈치 없는 늙은이들은 이만 빠져주자고!”

대장장이 한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마을 주민들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는 투박한 배려에

방 안의 공기가 훈훈해지던 찰나,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망을 보던 소년이 들이닥쳤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얼굴은,

벅찬 무언가로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촌장님! 모두들! 바깥에…

바깥을 좀 보세요! 빨리요!”


다급한 외침에 바르크가 벨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습니다.

서로를 의지해 걸어 나온 둘의 시선은

마을 주민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풍경에 멈췄습니다.


그곳에는— 카르의 군대가 쏟아부은 독으로

검게 죽어 있던 대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벨라의 입에서 전해진 꽃의 숨결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린 자리마다,

죽음을 뚫고 연둣빛 새싹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마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매캐하게 코를 찌르던 재 냄새는 사라지고

비에 젖은 흙내음과 어린 풀의 향기가

새벽 공기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머물던 자리에 생명이

먼저 건네는 수줍은 인사이자, 강인한 선언이었지요.


“이 싹들 좀 봐…”

벨라가 입을 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독을… 숲이 스스로 이겨내고 있어.

검은 땅을 정화하고 있다고.”


바르크는 그녀의 어깨를 더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잿빛에서 초록빛으로 번져가는 숲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네가 구해온 건 나 하나가 아니야, 벨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 숲이 너에게 답해주고 있는 거야.

이제… 우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누군가는 그 광경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비록 불타버린 폐허 위였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함께’라는 이름의,

그 어떤 창과 방패보다 강한 힘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언덕 위에 서 있는 둘을 비추었습니다.

서로에게 기대어 선 바르크와 벨라.

가장 깊고 어두운 늪에서 건져 올린 작은 꽃 한 송이가,

이 메마른 땅에 ‘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죽음이라 불리던 땅에

사랑이 기어이 뿌리를 내리던 때는

이 세계가 다시 살아가도 좋다고,

그 눈부신 초록빛이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편 '어둠을 지나온 이들만이 볼 수 있는 빛'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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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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