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38편)

어둠을 지나온 이들만이 볼 수 있는 빛

by 아르망

후우—
숨을 내쉰다는 행위 자체가
이 지하에서는 작은 결심처럼 느껴졌습니다.


공기는 오래된 늪의 기억처럼
비릿하고 끈적한 무게를 품고 있었고,

숨을 들이킬 때마다
폐 속 어딘가에 곰팡이 핀 솜뭉치가
하나씩 들어붙는 듯했지요.


어둠은 생각보다 교활했습니다.

빛이 닿지 않은,

가장 약한 부분을 비추어 의심부터 싹트게 만드니까요.


루칸은 숨을 삼켰습니다.
아니, 삼키려 했으나—
공기는 여전히 폐 안쪽에 눌어붙어 쉽게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의심과 공포가 공모해 빚어낸 형상은
어느새 제 본래의 재료들로 돌아가
그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뿌리.
아무 의지도 없는 진흙.
의미를 갖지 못한,
젖어 있는 어둠의 덩어리들.


그제야 루칸은 깨달았습니다.
방금 전 흔들린 것은
눈앞의 ‘무언가’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자기 자신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말조차
공기를 설득해야만 태어날 수 있는 듯했으니까요.


그 대신,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습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공포보다 느린 속도로.


그러자 통로는
비로소 통로의 얼굴을 되찾았습니다.

무너진 흙벽.
뒤엉킨 뿌리들.
물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들.


유령은 없었습니다.
비명도, 웃음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지하는
묵묵히 자신의 무게만을
그 자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서리의 손끝에서 추락한 성냥불은

붉은 꼬리를 그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 짧은 찰나,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진흙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꽃의 그림자.


휘이이잉—.

낡은 풍차의 벌어진 널빤지 틈새,

이빨 사이 같은 틈으로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파고들었습니다.

텅 빈 지하 통로의 벽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촉.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나무가 서로의 몸을 긁어대며 내는 건조한 마찰음.


마찰음은 숨과 숨 사이에 끼어들어

박자를 흐트러뜨렸고,
생각은 그 틈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랐습니다.


휘몰아치는 공기는 어느새 의미를 얻었고,
의미는 곧 의심으로 번졌습니다.


마치
이 지하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어떤 문장을
이제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처럼.



“……아.”


끝내 붙잡고 있던 숨이 제 주인을 놓아주는 소리.

루칸의 깊은 곳에서
팽팽히 조여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습니다.


다리가 풀린 것도,
몸의 힘이 빠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를 지탱하던 마음의 뼈대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조용히 주저앉는 순간.


이제 루칸은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칠흑 같은 어둠과
자신의 나약한 불안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꾸며낸,
지독하게 짧고도 집요한 연극이었다는 것을.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무대.

진흙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엉킨 뿌리와 썩은 껍질들 역시
자신들이 한때 무언가였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습니다.


통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아주 능숙하게
다시 ‘길’의 표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시치미를 떼는 솜씨마저 익숙해 보일 만큼.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유령 같은 것은 없었고,
다만 ‘공포’라는 이름의 불청객만이 한 발 먼저 들렀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간 것처럼.


그때였습니다.

쿵.

머리 위, 아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둔탁한 울림 하나가 시간을 끌며 내려앉았습니다.


잠시의 공백.
그리고 다시—

쿵. 쿵—.


누군가의 발소리라 하기엔 너무도 규칙적이었고,
무언가의 낙하라 하기엔 기이할 만큼 조심스러운.


마치 이 지하가 오랫동안 껴안고 있던 묵묵한 인내심을
하나씩, 하나씩 두드려 확인하는 듯한 울림.


아주 낮고,
아주 무겁게.


순간 루칸의 시야를 덮고 있던
두려움의 막이 걷히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공포의 방향이
단숨에 뒤집혔습니다.


위로.
저 어둠의 끝을 향해.


저 소리는
등 뒤를 쫓아오는 사냥꾼의 발걸음이 아닌,

누군가가— 아직 위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며 보내는
생존의 신호.


“알루스…!”

이번에는 비명을 삼키지 않고,
날이 선 이름을 그대로 어둠 속으로 던졌습니다.

소리는 차가운 숲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지만—

신기하게도, 이내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기야…!”

가늘게 떨렸으나 결코 부서지지 않은 목소리.
멀었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목소리.


루칸은 어느새 길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잔혹한 경사면을
손과 무릎으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튀어나온 나무뿌리는
족쇄처럼 발목을 낚아채고,
달빛에 흔들리는 그림자는
자꾸만 헛된 방향을 가리켰지만—


심장은 그 모든 방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거친 숨이 터져 나오던 그가
멈춰 선 곳은 입구 바로 아래.

그곳에는 참혹하게 뜯겨 나간
나무 계단의 잔해만이 말없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알루스!”

끊어진 계단 끝, 알루스는 허공에 몸을 걸친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루칸을 따라 내려오다

낡은 나무가 무너져 내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 손은 썩은 난간을,
다른 한 손은 벽에서 튀어나온 뿌리를
생명줄처럼 움켜쥔 채.


얼굴은 흙먼지와 식은땀으로 얼룩졌고
안경은 비뚤어져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루칸을 향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알루스… 왜… 여기에…”

숨이 가빠 문장은 끝까지 닿지도 못했습니다.


“불렀어. 계속.”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덧붙였습니다.

“아무도 대답이 없어서.”


지하에서 들려오던
그 수많은 속삭임들, 누군가의 것이라 믿었던
그 기괴한 목소리들은—

두려움이라는 벽에 부딪혀
자신에게 되돌아온 비명 같은 메아리였던 것.


루칸은 알루스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끌어올렸습니다.


그 순간,

요동치던 숲의 공기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것처럼.



지상의 공기를 들이마신 알루스는,
폐 속 깊숙이 고여 있던 어둠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숨마다 지하의 축축한 그림자가
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는 몇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숲의 출구를 향해 몸을 옮겼습니다.


“어서 가자, 루칸.
여긴…… 미쳤어.
더 이상 있을 곳이 아니야.”


그러나 루칸의 발은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낡은 풍차의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끼이익…… 턱.
끼이익…… 턱.


바람에 떠밀려 억지로 회전하는 거대한 날개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계속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목이 잠긴 거대한 짐승이, 끊어질 듯한 숨을
억지로 이어 붙이며 내뱉는 고통의 울음 같았습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풍차의 몸은
비명을 기억한 나무처럼 떨렸고,
회전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버둥거림처럼 보였습니다.


루칸은 그 소리에서
이 숲이 아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이곳은 아직 침묵을 끝내지 않았고,
풍차는 여전히 멈추지 못한 채
무언의 증언을 계속하고 있었으니까요.


"……비명이었어요."

루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울림은 깊었습니다.


"뭐?"

"아까 지하에서 우리를 짓누르던 그 소리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께를 꾹 눌렀습니다.

"우릴 쫓아오는 발소리가 아니었어요.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부서지며 내는, 숨 막히는 소리였어요."


그 순간, 지켜보던 서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루칸을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그것은 흥미라기보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확신에 가까운 시선.


"다시 들어가야겠어요."

"뭐?" 알루스의 목소리가 공포로 갈라졌습니다.

"방금 겨우 나왔는데…… 다시 저 지옥으로 들어가자고?"


대답 대신,

루칸은 닫혀 있던 지하실의 낡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다시금 어둠의 입구가 드러났습니다.


알루스는 머리를 감싸 쥐며 짧게 신음했습니다.

"이런,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미 친구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지요.



다시 발을 들인 지하실.

두려움이 한 꺼풀 사라진 눈으로 바라보니,

비로소 진실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지하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

풍차의 거대한 심장과도 같은 톱니바퀴 사이에,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차가운 이물질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검고 육중한 쇠말뚝 하나가,

기계의 호흡을 틀어막듯 기어

틈새를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풍차는 돌고 싶어 비명을 질렀고,

쇳덩이는 그 간절한 움직임을

억지로 짓누르고 있었던 것.


쿵, 쿵.

유령의 발소리라고 생각했던 저 소리는,

톱니가 쇠기둥에 부딪힐 때마다

내지르는 풍차의 처절한 고통의 맥박.


"……이거였어."

알루스는 안경을 벗어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고장 난 것을 고쳐야 한다는

강철 같은 의지만이 남았습니다.


"하나." 거친 숨을 고르고, "둘."

서로의 어깨를 단단히 맞대고, "셋!"


둘은 동시에 온몸의 체중을 실었습니다.

손끝이 갈라지고 어깨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도 그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깡—!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마침내 검은 쇠말뚝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순간,

숲의 그림자를 짓누르던 끔찍한 굉음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습니다.


그리고.

웅…… 웅……

정적을 깨고, 풍차의 날개가 다시 돌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에 떠밀려서가 아닌,

스스로의 맥박을 되찾아 부드럽게 그리기 시작한 원.


지하실을 가득 채우던

고인 물 냄새와 썩은 내음이 걷히고,

어디선가 맑고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마치 막혀 있던 혈관이 뚫려 다시 피가 돌듯,

그림자 숲 전체가

아주 깊고,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았지요.



첫 번째 풍차를 바로잡고 나온

루칸은 숲 너머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을의 윤곽을 따라

어둠 속에서 솟아 있는 수십 개의 그림자.


밤을 붙잡아 매단 말뚝처럼 서 있는

'그림자 파수꾼' 탑들.

본래라면 숲의 바람을 받아 서로의 소리를 맞추며

하나의 화음을 만들었을 구조물들.

그러나 지금은 어느 하나 맞는 음이 없었습니다.


끼리릭— 쇳소리가 찢어지고,

쿵, 쿵— 무언가 안에서 스스로를 두드리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겹쳐져 마을 전체를 덮는

기묘한 불협화음의 파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십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부짖는 것처럼요.


"……전부야."

루칸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나만 고장 난 게 아니야."

그의 시선이 탑들을 훑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마을 전체를 비명 속에 가둬놓은 거야."


이제 설명은 필요 없었습니다.

둘은 말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루칸은 밧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파수꾼 탑의 벽을 기어올랐고,

알루스는 아래에서 톱니와 축을 하나씩 더듬었습니다.

쇠가 맞물린 틈, 그 어색한 침묵의 지점들.


"루칸! 여기도야! 톱니 사이에……또 있어!"

"봤어요."


짧은 대답.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

깡—!

망치가 내려앉자 검은 쇠말뚝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표면에는 지워지지 않은 문양이 찍혀 있었습니다.

대도시, 블롯(Blot).

의도적으로 박아 넣은 '불협화음의 씨앗'.


탑 하나가 고쳐질 때마다 밤이 달라졌습니다.

끼이익— 찢어지던 소리가 멈추고,

후우우— 낮고 맑은 숨 같은 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퍼져나갔습니다.

비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노래가 남았습니다.


하나, 또 하나.

탑이 고쳐질수록 마을은

조금씩 자신의 밤을 되찾아 갔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둘, 밖으로 나왔습니다.


문턱을 넘는 발걸음은 여전히 느렸고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없었지만

숲의 중앙,

안개가 걷힌 공터로 주민 모두가 찾아왔습니다.


밤은 언제나 숲보다 먼저 모였습니다.

그림자 숲의 공터에도 해가 기울자

가장 먼저 밤이 내려앉았습니다.

낮에는 길이던 곳이 해가 지자 곧장

의심의 바닥이 되었지요.


주민들은 원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까이 서면 서로의 숨이 섞였고,

너무 멀어지면 누군가 먼저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가 자기 그림자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습니다.


각자 불을 하나씩 들었습니다.

횃불도, 화로도 아닌 손바닥만 한 작은 등불 하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짓말이 숨을 자리만큼은 남기지 않겠다는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요.


그때, 바람이 한 번 지나갔습니다.

등불의 불꽃이 기울었고, 그 빛이 흔들리는 순간.


"……소리가."

"멈췄어."

"유령이 마을로 내려오는 거 아니야…?"

속삭임들이 공터를 스쳤습니다.


그 앞으로 루칸과 알루스가 걸어 나왔습니다.

루칸은 어깨에 멨던 자루를 풀어 촌장 앞에 쏟아부었습니다.


철그렁—! 무거운 쇳소리가 밤의 중심을 갈랐습니다.

검은 쇠말뚝들이 산더미처럼 등불 아래 쌓였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잠 못 들게 했던 '유령'의 정체입니다.

블롯의 강철로 만든— 카르 시장의 선물."



알루스가 쇠말뚝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등불에 비추자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숲이 여러분을 저주한 게 아닙니다."

그의 말은 차분했습니다.


"카르가 숲의 목소리를 비명으로 바꿔놓았을 뿐입니다.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

서로를 밀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웅성임이 공터를 채웠습니다.

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 소리가… 밤마다 우릴 감시하던 그 비명이…?"


"비명은 맞습니다." 알루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만— 유령의 비명이 아니라,

도와달라는 비명이었죠."


그는 등불을 향해 쇠말뚝을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일 때,

숲은 혼자서 울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공포의 대상이 연민으로 천천히 모양을 바꾸는 순간.


"이런… 세상에…"

한 노인이 쇠말뚝을 움켜쥐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것 때문에 내 이웃을 팔아넘기려 했다니…"


쇳덩이가 그의 손에서 떨렸습니다.

분노는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서로를 향하던 시선이

마침내 보이지 않는 한 점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루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시선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밀고장을 훑었습니다.

종이는 가벼웠지만,

들고 있는 손은 무거워 보였지요.


"카르 시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숲이 저주받았으니 이웃을 의심하라고."


그는 쇠말뚝들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숲은 저주받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장 났을 뿐입니다."


루칸은 주민들의 눈을 하나씩 마주 보았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미워한 건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마음이 잠시 고장 났던 것뿐입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누군가 훌쩍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손에 쥔 밀고장 종이가

처음으로 부끄러워 보였습니다.


휘이이잉—

그때, 고쳐진 풍차들이 마침내 제 속도를 되찾았습니다.

삐걱이던 숨이 풀리고,

멈춰 있던 날개들이 힘차게 원을 그렸습니다.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맑은 결을 품고

마을을 덮쳤습니다.


"어… 어?"

누군가의 손에서 밀고장 한 장이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둘 주민들은 종이를 놓았습니다.


서로를 고발하던 수십 장의 종이가 하얀 새 떼처럼 허공으로 흩어졌습니다.

바람은 그 종이들을 숲의 저편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되돌아오지 말라는 듯 아득하게.


"아아…" 촌장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곁에 서 있던 청년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겁이 났었어."


주민들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울음은 변명보다 먼저 흘러갔습니다.

그 위로 그림자 숲의 달빛이

처음으로 따뜻하게 내려앉았지요.


그 모습을 멀리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던

서리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습니다.

그 미소는 살아있는 자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희미했고,

유령의 것이라기엔 묘하게 따뜻했습니다.


"제법이네."

그녀의 시선이 고쳐진 풍차 날개를 따라

천천히 돌았습니다.


"톱니바퀴만 고친 게 아니라,

고장 난 밤도 고쳐냈어."

"잘했어, 나의 자경단."


서리는 달빛에 잠긴 마을을 등지고 돌아섰습니다.

발을 떼는 순간,

그녀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

숲의 어둠과 하나로 섞여 들었습니다.


그녀의 어깨 뒤로,

바람도 불지 않는데 붉은 깃털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졌습니다.

깃털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마치 주인을 호위하듯

그녀의 주위에서 붉은 궤적을 그렸습니다.


"이제 이 숲의 그림자는—

카르의 말보다, 너희의 침묵을 더 신뢰할 테니."


서리의 형체는 안갯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녀가 서 있던 나무 가지 끝에는 여전히 붉은 깃털 하나가 꽂힌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감시자처럼, 혹은 수호자처럼.




숲은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더 이상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림자 숲은— 아주 오랜만에,

밤을 두려움이 아닌 고요함으로 받아들였고,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 법을 배운 채,

조용히

밤을,

밤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다음 편 '파도를 마주 선 등대처럼'으로 이어집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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