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40편)

새벽을 덮은 하늘

by 아르망

바람의 숲이 오랜만에 비명이 아닌 노래를 품었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처럼 날을 세웠던 바람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 새의 깃털보다 가벼워졌고,

잎사귀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서늘한 침묵은 결결이 다듬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밀려나고,

그 자리마다 숲의 다정한 안부들이 소리로 피어났습니다.

이제 나뭇잎들은 들키지 않으려 숨을 참는 대신,

바람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서로의 어깨를 비비며 바스락거리는 농담을 나누었지요.


자유를 되찾은 그 투명한 일렁임은 잎새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며

간지러운 수다들을 하나씩 모아
숲 전체에 잔잔한 울림을 퍼뜨렸습니다.


어느덧 숲의 노래는 하늘의 눈부신 색채와

하나로 뒤섞였고,

춤추듯 날아오른 빛의 파편들은

햇살이 내려앉은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잠시 파르르 떨다

이내 가루처럼 부서지며

온 세상에 금빛 가루를 뿌렸습니다.


바람의 그 부드러운 날갯짓은 대지를 스치듯

낮게 흘러가며
막 깨어난 들꽃들의 향기를 실어 나르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야생풀들의 웃음소리는
멀리, 더 멀리 데려갔습니다.


시간이 멈춘 자리에 굳어진 초록색 물감처럼

가만히 덧칠되어 있던 그들이,

끝내 제 이름을 잃지 않고

맥박처럼 고동치는 찬란한 새벽을

품에 안게 된 것이었지요.


나무로 엮은 작은 깃발들이 바람을 받아

천천히 흔들렸습니다.
오늘의 바람은,
누군가를 재촉하지 않는 손길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숲 전체가 하나의 악기라도 된 듯,

보이지 않는 선율은 자유롭게 유영하며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평온의 문장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광장 한복판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커다란 무쇠솥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그 안에서 진하게 우러난 수프는

솥뚜껑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부글부글 기분 좋은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장작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내뱉는 매콤한 연기는

숲의 서늘한 기운을 밀어냈고,

갓 으깬 허브의 알싸한 향과

불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견과류의 진한 고소함이

공기를 든든하게 데우며

주민들의 마른 허기를 어루만졌지요.


아이들도 자유로운 바람이 되어

맨발로 광장을 누볐습니다.

거친 흙바닥을 디디는 발바닥의 감촉조차

축복이라는 듯,

서로 부딪혀 굴러도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이슬 맺힌 풀꽃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광장의 소음과 섞여 공중으로 흩어지다,

나무로 엮은 천연색 깃발들의 펄럭임에 실려

아주 멀리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주민들이 부딪히는 나무 잔에서는

달콤한 도토리 꿀물이 넘쳐흘러 지면에 얼룩을 남겼고,

달큼한 내음은 축제의 흥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방금 구워져 나온 빵의 노릇한 온기가

주민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질 때마다,

숲은 다정한 안부의 문장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지요.


“자, 여기 보세요!
우리 숲을 지켜준 자경단 분들을 위해

구운 빵입니다!”


앞치마와 소매 끝에 하얀 밀가루를

꼭 첫눈처럼 묻힌 인자한 노인이,

화덕에서 막 꺼내어 기분 좋은 온기를 머금은 빵을

두 손으로 내밀었습니다.

그 고소한 냄새는 루인과 릴리의 코끝을 간지럽히며,

비로소 전투가 끝났음을 실감하게 했지요.


황금빛으로 터진 빵 껍질 사이로

뽀얀 김이 천천히 흘러나와

둘의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루인과 릴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잔에 달큼한 도토리 음료를 가득 채웠지요.


챙그랑, 하고 부딪히는 맑은 잔 소리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수많은 안부와 고백들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루인은 이제 투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바람에 스치며 이마를 드러냈고,
햇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는
전장에서 보이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지요.


“루인 아저씨!! 진짜로 탑을 무너뜨린 거예요?”

아이 하나가 허리춤을 붙잡았습니다.


“뭐, 탑이 먼저 무너지겠다고 하더군.”

“거짓말! 돌이 먼저 말할 리가 없잖아요!”


아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루인은 괜히 귀를 긁적였습니다.

이런 환호는 아직 어색한 루인.


전장에서는 검을 휘두르면 되었지만,

축제 한가운데선 웃어야 했습니다.

그건 전장을 헤쳐 나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루인은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입가에 경련이 일 만큼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서투른 영웅의 모습에

마을 주민들은 더 큰 박수를 보냈지요.


그때였습니다.

“영웅님, 혼자 너무 인기 많으신 거 아닌가요?”

인파 사이를 비집고 릴리가 다가왔습니다.


바람의 숲 특유의 초록빛 수가 놓인 옷자락이
걸음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오늘의 그녀는 전사가 아니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화살통 대신 달콤한 산딸기 향기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루인의 눈동자 속에서

방금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보였습니다.


릴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오자,

그는 지금 마주한 이 여인이 자신이 알던

그 고집불통 궁수가 맞는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야 했지요.


“세상에, 투구 벗으니까

이제야 제대로 된 얼굴 같네요?

진작 좀 벗고 다니지 그랬어요, 우리 강철 전사님?”


릴리가 루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이마를

빤히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습니다.

루인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릴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나지막이 대꾸했지요.


“글쎄. 네 앞에서는……

이젠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상치 못한 루인의 담백한 말에,

릴리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습니다.

찰나의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고,

릴리는 달아오르는 뺨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먼 산만 바라보았지요.


“……치, 그건 전투 중에 답답해 보였다는 뜻이었거든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그 얼굴이 좋다고 한 건 절대 아니니까!”


“그래? 그럼 다시 쓸까?

릴리가 보기 답답하다면야.”


루인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옆에 놓인

낡은 투구를 집어 드는 시늉을 하자,

릴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팔소매를 덥석 붙잡았습니다.


“아니요! 절대 안 돼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튀어나온 대답과 함께,

릴리는 제 몸이 루인의 단단한 가슴팍 근처까지

바싹 밀착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 바람에 릴리의 어깨는

루인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듯 깊숙이 맞닿았고,

흩날린 머리카락 끝은

그의 턱 끝을 다정하게 간질였지요.


그 순간, 숲을 가로지르던 장난스러운 바람 한 자락이

둘 사이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바람은 릴리의 머리카락에 밴 싱그러운 풀꽃 향기를

루인의 코끝으로 실어 날랐고,

마치 둘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버리려는 듯

그들의 옷자락을 가볍게 휘감으며

쉬던 공기마저 하나의 색채로 물들여 버렸지요.


맞잡은 소매 끝으로

루인의 단단한 팔 근육의 온기가 전해지자,

릴리의 심장은

솥 안의 수프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축제의 환희가 광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뜨겁게 달아오를 즈음,

릴리는 루인의 소매를 나비의 날갯짓처럼

톡 건드렸습니다.


“따라와요. 보여드릴 게 있어요.”


장난스럽게 톡 쏘아붙이던 평소의 말투였지만,

루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에는

새벽안개 같은 묘한 울림이 서려 있었습니다.


릴리가 그를 이끈 곳은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비껴간,

오래된 떡갈나무 공터.

처음으로 제 몸보다 큰 활을 쥐고 시위를 당겼던,

그녀의 서사가 시작된 요람과도 같은 자리.


떡갈나무 줄기에는 어린 날의 서툰 화살촉이 남긴

깊은 홈들이 패어 있었고,

그 갈라진 틈마다 숲의 오래된 기억들이 이끼처럼 자라나 있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 마치 태초부터

그곳에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 같은

한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릴리와 꼭 닮은 눈매를 가졌으나,

그 안에는 숱한 계절의 풍파를 견뎌낸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정적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달빛을 머금은 억새처럼 출렁였고,

주름진 손마디에는 바람의 숲을 지켜온

고단한 긍지가 새겨져 있었지요.


“엄마…….”

릴리의 목소리가 갓 피어난 잎새처럼

가늘게 떨렸습니다.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 때도 결코 젖지 않았던

그녀의 눈시울에 맑은 이슬이 맺혔습니다.


릴리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전장에서 돌아온 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그러고는 흙먼지가 채 가시지 않은 릴리의 뺨을

거친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며,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건넸습니다.


“돌아왔구나. 내 딸.”


그 짧은 인사 한마디에 릴리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으며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릴리의 등을 토닥이며

숲의 바람이 남긴 먼지를 털어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딸의 어깨너머로

묵묵히 서 있는 루인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루인은 자신을 꿰뚫는

그 투명하고도 단단한 시선 앞에서,

마치 거대한 고목의 뿌리 앞에 선

어린나무처럼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숲의 역사를 짊어진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고요하고도 매서운 문답.


마침내 어머니가 릴리를 품에서 천천히 놓아주며,

루인을 향해 첫마디를 떼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군단장 루인이군요.

숲의 숨통을 틔워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수백 년을 버텨온

대지의 울림처럼 깊고 묵직했습니다.

거친 나무껍질처럼 단단함을 품고 있었으나,

그 마디마디에는 풍파를 이겨낸 이의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습니다.

루인은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지만 탑을 무너뜨린 것은

저 혼자만의 공이 아닙니다. 릴리가 아니었다면….”


“알고 있어요.”

어머니의 시선이 루인의 말을 가로채며

천천히 딸에게로 옮겨갔습니다.

그 눈빛은 대견함과 애처로움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요.


“이 아이는 늘…… 땅의 평화보다

하늘의 소란을 먼저 쏘아 맞히던 애였으니까요.

그 성정은 누굴 닮아 어디 가지 않는 법이지.”


그녀의 문장이 끝나자마자

공터에는 찰나의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농담을 나누던

축제의 소음은 이곳까지 닿지 못했고,

주변은 비밀을 품은 듯 일순간 고요해졌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오늘을 정말 좋아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엄마?”


릴리가 할머니의 활자국이 남은

떡갈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물었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의 눈빛이 호수 위의 물결처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네 할머니는…

하늘을 아주 오래 올려다본 사람이었어.

자신의 영혼이 깎여 나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숲의 천장을 지키기 위해

제 평생을 활시위 위에 얹어두셨지.”


루인은 그 말을 가슴 깊은 곳에 새겨 넣으며,

비로소 안개 너머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숲의 전설은 눈부시게 빛나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차마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껴안고

버텨온 기억들의 매듭이라는 것을.

그것은 누군가 자신의 밤을 깎아 빚어낸 평화였으며,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대신해 불어오는

바람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묵직한 여운을 남긴 채 자리를 뜨자,

릴리는 오래된 나무 둥치에 가만히 걸터앉았습니다.


“할머니는 하늘을 쏘았어요.

숲의 숨통을 조이던 독수리 부족의 왕을

그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죠.”


“독수리 부족의.. 왕이라고?”

“라크.”


그 이름이 릴리의 입술을 타고 바람에 실려 가자,

숲은 마치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일순간 숨을 죽이며 고요해졌습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그날은 분명 정오였는데도

숲은 깊은 밤처럼 어두웠대요.”


릴리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빈 하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수천 마리의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태양을 전부 가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궤적을 그리듯 움직였습니다.


“할머니는 숲에서 가장 높은 나무 끝에 올라서서,

바람이 거칠게 휘어지는 순간을……

영원 같은 침묵 속에서 끝까지 기다리셨대요.”


잠깐 숨을 고른 릴리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번졌습니다.


“바람을 이기려 쏜 게 아니었어요.

바람이 지쳐 방향을 바꾸는 그 찰나,

운명이 허락한 단 한 번의 틈을 노린 거였죠.”


그때, 숲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그날의 전율을 기억해내기라도 한 듯

둘의 뺨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화살은.”

릴리의 목소리가 대지의 낮은 울림처럼 가라앉았습니다.


“하늘의 주인이라 자부하던

라크의 왼쪽 날개를 단숨에 꿰뚫어 버렸죠.”


잠시 둘 사이엔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날 이후로 하늘은 소름 끼칠 만큼 조용해졌어요.

하지만…….”


천천히 내려온 릴리의 고개가

루인의 가슴팍 언저리에 멈추었습니다.


“할머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죠.

세상은 할머니가 라크를 추락시켰다고 노래하지만,

숲은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 라크를 삼킨 하늘이

끝내 할머니조차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을요."



루인은 말없이 릴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잠시 고개를 숙여 발끝의 흙을 살피던 릴리는,

이내 무거운 그림자를 털어내려는 듯

애써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슬픈 이야기,

안 하기로 했었는데. 오늘은 분명—”


말끝이 옅은 안개처럼 흐려졌습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떨리는 진심을 담아 물었습니다.


“루인. 이 모든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어디로 갈 건가요?”


루인은 먼 숲의 지평선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습니다.


“모르겠다.”

“모른다고요?

그게 전설의 용사님이 내놓을 대답인가요?”


릴리가 실망 섞인 장난기를 담아 되묻자,

그가 짧은 숨을 내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네가 있는 쪽이겠지. 바람이 불어와 머무는 곳이

결국 네 곁이라면, 내 발걸음도 그곳에서 멈출 거다.”


그 순간, 숲을 지나며 잎새들을 흔들던 바람이

길을 잃은 것처럼 일순간 멈추었습니다.

릴리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망설이듯 허공을 배회하던 그녀의 손끝은,

결국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운명처럼

루인의 투박한 손등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맞닿는 순간 전해진 서로의 체온은,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의 소란보다

훨씬 더 또렷하고 강렬하게 심장을 두드렸습니다.


“도망치면 안 돼요.”

릴리가 숨결 같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습니다.

“약속하지. 도망치지 않겠다고.”


“이번엔…… 진짜로요. 투구 뒤로 숨지도 말고,

전장 뒤로 사라지지도 말고.

내 옆자리에서 도망치지 마요.”


루인은 대답 대신, 맞잡은 릴리의 작은 손을

더 단단히, 그리고 소중하게 꼭 쥐었습니다.


산맥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막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가느다란 빛이 공터를 스치며,

둘의 맞잡은 손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저… 저건 뭐죠?”

한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던 빛이, 멈췄습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거대한 입속으로

씹혀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의 붉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무언가 검게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먹구름은 아니었습니다.
구름은 바람을 따르는데,

저것은—

바람을 거슬러 오고 있었습니다.


숲이 먼저 불길함을 알아차렸습니다.

잎사귀 하나가 떨림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바람이 방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릴리의 동공이 천천히 넓어졌습니다.

“…루인.”


멀리서—

낮게, 길게.

‘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

깃털이 허공을 찢는 마른 진동.

처음에는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내—

수백, 수천 개의 날개가 동시에 꺾이며 내는
메마른 천둥 소리.


하늘이 점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점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서,

산맥 위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쳤습니다.

한쪽 날개에 길게 패인 흉터가
붉은 새벽빛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라크.

이름이 먼저 떠올랐는지, 아니면 공포가 먼저였는지

릴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낮은 울림이 떨어졌습니다.


“그 피… 아직도 이 숲에 흐르는가.”


바람을 타고 내려온 것이 아닌,
바람을 짓눌러 내린 목소리.

오래전, 쏘아 떨어졌던 자.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존재.


릴리의 숨이 얇아졌습니다.

할머니의 화살이 남긴 흉터가—

이제,
그녀를 향해 다시 열리고 있었습니다.


루인은 말없이 검자루를 움켜쥐었습니다.

어디선가,
축제의 깃발 하나가 힘없이 풀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웃음소리는 이미 사라져 있었고,

새벽은—
어느새 하늘에 덮였습니다.


수많은 날개들이 태양 위를 가로질렀습니다.

빛이 잘려 나가고,

바람의 숲은
다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늦게 도착한 전령 하나가
광장 끝에서 무릎을 꿇듯 쓰러졌습니다.

찢어진 깃발 조각이 그의 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검은 문장.

카르의 문장.

숨이 끊어질 듯 흔들리는 목소리.


“북쪽 전선에서… 소식이…
카르가… 하늘 부족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더 들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하늘이 답하고 있었으니까.




하늘의 빗장이 풀린 자리에 태고의 원한이 날개를 달고 덮쳐오니,

아, 가여운 숲이여.

그대에게 허락된 평화는 고작 찰나의 숨비소리였던가.

새벽을 덮은 검은 하늘이

이제 대지의 숨결을 끊으러 온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숲의 약속은 검은 날갯짓 아래

속절없이 흩어지네.


(다음 편 '바람을 듣는 아이'로 이어집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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