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내라 아저씨! [가까운 말들05]
===================================================================
[가까운 말들05]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
아저씨에게서는 냄새가 난다. ‘냄새’ 대신 ‘향기’를 쓰고 싶지만 ‘아저씨의 향기’는 아무래도 형용모순이다. 그러니 아저씨의 냄새가 어울린다. 그리고 그 냄새는 아무래도 쉰내나 짠내일 수밖에 없다. 꼰대의 냄새를 피우려는 아저씨들과 허무의 그늘을 드리우는 아재들이 많아지고 있으나 그 근저에는 역시 이런 종류의 냄새들이 배어난다. 그런 냄새나는 아저씨들의 흔적은 이 땅의 모든 말 곳곳에 남아 있다.
남진아비, 노래 잘하는 멋쟁이 아저씨 남진 씨의 아버지는 물론 아니다. 경상도 지역에 남아 있는 ‘유부남’이란 말이다. ‘아비’는 모두가 아는 뜻이지만 ‘남진’은 감이 잘 안 잡힌다. 한자로는 ‘男人’이라 쓰니 한자의 뜻 그대로 풀면 ‘사내 사람’이란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더 알아듣기 쉽게 하려면 ‘남자 사람’이란 말이다. 한자 ‘人(사람 인)’의 음이 요즘에는 ‘인’이지만 과거에는 반치음을 가졌으니 오늘날 경상도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하면 ‘남진아비’는 ‘남자 사람 아비’인데 여전히 뭔가 어색하다. 남자는 모두 사람이고 아비는 당연히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왜 이 말이 유부남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기는 한다. 남자인데 아비이면 아내가 있을 터이니 결국 아내가 있는 남자인 ‘유부남’이 되기는 한다.
남진아비는 남진어미와 짝을 이룬다. 이 역시 경상도 말에 남아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세종대왕 당시부터 쓰이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은 남진아비보다 더 이상하다. ‘남진어미’를 있는 그대로 풀면 ‘남자 사람의 어미’일 텐데 그렇다면 남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진어미는 남편이 있는 여자, 즉 ‘유부녀’란 말이다.
아내를 뜻하는 ‘지어미’란 말이 있으니 ‘남진어미’ 속의 ‘어미’의 뜻을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지어미’란 말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 찜찜하다. ‘집어미’가 돌고 돌아 ‘지어미’가 된 것이니 이 말은 결국 집에 있는 아이의 어미가 된다. 그러니 남진어미는 남편이 있고 집에 들어앉아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여자를 뜻한다. 완벽히 유부녀란 뜻이다.
남진아비는 남진계집과도 짝을 이뤄 경상도 말에 남아 있다. 계집은 본래 여자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근대에 이르러 이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 어쨌든 ‘남진계집’은 남자가 있는 여자, 혹은 남자의 여자 정도로 풀이된다. 어느 쪽의 뜻이든 결국 유부녀란 뜻인데 그 본뜻을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남진아비는 곧 아저씨, 아니 경상도에서는 아재가 된다. 아저씨는 본래 아버지의 사촌, 즉 오촌 당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뜻이 점차 넓어져 아버지 또래의 남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버지 또래의 남자라면 당연히 결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남진아비는 아저씨가 될 수 있다. 상대가 결혼을 안 한 노총각이라는 것을 알면 아저씨라 부르기가 미안해지는 것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남진아비는 유부남이기도 하고 아저씨이기도 한데 유부남과 아저씨는 풍기는 냄새가 확연히 다르다. 아저씨란 말이 쉰내를 풍긴다면 남진아비, 혹은 유부남이란 말은 비린내를 풍긴다. 유부남이란 말이 쓰인 맥락을 보라. 그저 단순하게 ‘아내가 있다’가 아닌 ‘아내가 있는데도’의 용법으로 쓰인다.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든가 결혼을 했는데 총각 행세를 했다든가 할 때 나오는 말이 유부남이다. 아저씨의 짠내는 삶의 냄새니 받아들일 만하지만 유부남의 비린내는 거짓의 냄새니 고약하다.
그런데 비린내가 아닌 짠내를 풍기는 남진아비는 슬프다. 아내가 있는 남자, 그리고 아이가 있는 남자의 어깨에 지워지는 무게가 그렇다. 비린내를 풍기는 남진아비는 소수, 대부분의 남진아비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니 애잔하다. 남진아비가 아닌 홀아비였다면 홀몸만 챙기면 되니 삶의 무게가 덜 버겁겠지만 이미 가정을 꾸린 이상 그 무게를 오롯이 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니 슬프다.
한반도의 북쪽 끝, 두만강 유역의 함경도 지역에 이르면 남진아비는 더 슬퍼진다. 이 지역의 남진아비는 ‘나그네’로 둔갑한다. 남진어미 혹은 남진계집은 ‘안까이’가 되니 지역마다 다른 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그네다. 나그네는 본래의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 혹은 낯선 남자의 뜻이다. 안까이는 집에 있는 여자 정도의 뜻이니 함경도의 아내는 떠돌이나 낯선 남자와 산다.
함경도 지역에서 남편을 왜 나그네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원이 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뭔가 역사적인 배경, 문화사적인 배경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배경을 알 수 없으니 그저 일상적인 뜻으로 보면 남진아비가 나그네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서러울 수밖에 없다.
남진아비라 불리든, 나그네라 불리든 그이는 집 안팎에서도 떠도는 신세이니 서글프다. 안방은 누구의 방인가? 아버지가 아랫목에 버티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차려온 밥상을 받고 물리는 모습을 보거나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 제일 큰 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안에 있는 방, 그래서 아내의 방이다. 그 방에 어느 순간 남진아비 혹은 나그네가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려 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의 방에 얹혀 사는 신세다.
본래 남자들에게는 방이 따로 있었으니 사랑방이 바로 남자들의 방이다. 남진아비들도 평소에는 사랑방에서 지내다가 부부가 같이 지내고자 할 때는 남진어미가 있는 안방에 잠시 신세를 졌다. 그런데 집의 구조와 공간의 분할이 단순해지면서 사랑방은 없어지고 남진아비들이 안방으로 쳐들어간 격이다. 과거에 남진아비들이 무한권력을 휘두를 때는 안방이 마치 자신의 방인 양 행동했지만 요즘에 그런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그러니 남진아비들은 집안에서는 갈 곳을 잃은 나그네다.
집을 나선 남진아비는 아저씨가 된다. 스스로 힘든 시절을 보낸 경험을 떠올리며 ‘나때’를 말하면 삽시간에 ‘라떼’가 된다. 사람들과 어울려 보려고 딴에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얘기를 꺼내면 바로 삼류 개그맨이 된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아저씨들끼리 모여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남진어미 험담,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불만, 자신들보다 더 아재인 이들에 대한 울분을 토해 낸다. 시끄럽다 눈총을 받고 아저씨 냄새가 난다고 미움을 받는다.
그런 남진아비가 해방이 되는 날이 있으니 남진어미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는 날이다. 오죽하면 그런 날 ‘올레’ 하며 만세를 부르는 광고도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 가지 못한다. 찬밥, 라면, 짜장면으로 때우는 것도 며칠이다.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소진되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다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빨랫감들이 쌓여 입고 나갈 옷마저 마땅치 않으면 남진어미가 그립진 않더라도 필요하니 해방감을 포기해야 한다.
남진아비와 아저씨들의 초라한 자화상만 그렸지만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남진아비들이 많을 터, 누구는 그렇게 살고 있고 누구는 몇 번씩 경험하고 있을 현실이다. 밖에서는 일의 무게가 집에서는 가족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에서의 자리와 가정에서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니 그리 할 수도 없다. 그렇게 남진아비는 나그네 설움을 겪으며 산다.
그러나 힘내라 남진아비여! 남진아비는 유부남, 유부남은 아내가 있는 남자다. ‘있는 집 자식’은 누구나 부러워한다. 그 ‘있는’의 주어가 재산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짐으로서의 아내가 아니라 비빌 언덕으로서의 아내가 있으니 좋은 일이다. 아내가 있으니 아이도 있을 수 있어 또 좋은 일이다. 있는 남자 남진아비여,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