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즈, 비 엔비어스 [가까운 말들]
===================================================================
[가까운 말들06]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
부러움은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배가 아프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것이 시기와 질투로까지 번질 수 있으니 웬만하면 억눌러야 한다. 그런데 어린 딸내미가 부럽다. 녀석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 혹은 기타를 안고 있을 때 그렇다. 정신없이 널려 있는 콩나물대가리를 빼놓지 않고 손가락으로 눌러 음악을 만들어낸다. 박자를 수없이 쪼개고 점과 붙임줄로 밀고 당겨놨어도 박자를 놓치는 법이 없이 잘도 따라간다. 그것이 영 부럽다.
이생글, ‘이번 생에는 글렀어!’를 이렇게 줄여 표현하는데 늦깎이로 악기를 배우는 이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다. 악기 연주에 대한 로망 때문에 늦었지만 시도해 보는 이들이 재능을 낭비하며 살아온 천재가 아닌 이상 다들 그리 느낀다. 나 또한 그렇다. 악기가 아니라 음악 전부가 그렇다. 음치에 박치니 노래를 잘 부르기는 틀렸다. 피아노를 배우려 하니 왼손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데 영혼이 따로 논다. 첼로를 배우려 하니 외국어와도 같은 낮은음자리 보표와 외계어와도 같은 가온음자리 보표가 괴롭힌다.
이게 다 피아노 탓이다. 많은 아이들이 바이엘부터 시작해 체르니 몇 번까지는 하는 시절이었지만 시골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사방 몇 십 리를 뒤져봐도 건반악기라고는 학교에 있는 풍금 한 대가 유일했다. 어쩌다 건반을 누르면 선생님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는데 바이엘과 체르니를 알 턱이 없다. 피아노를 배웠다면 넉 줄짜리 악보도 한글로 보이고 박자도 안 놓치고 잘 따라 갈 텐데 그 놈의 피아노를 못 배웠으니 ‘이생글’이다.
그래도 부러우면 지는 법,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에게 처음으로 간청을 해 봤다. 아이가 참여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정기연주에 객원 연주자로 참여해도 되겠는지를.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늘 그렇듯 연주자가 부족하니 정기 연주회 때는 객원 연주자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아는 터였기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딸아이가 흔쾌히 허락을 한다. 첼로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먼저 배운 클라리넷이 낫겠다. 관악기는 늘 부족하니 지휘자나 담당 선생님께 부탁하기도 수월했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오케스트라 연습, 클라리넷 파트는 둘밖에 없다. 클라리넷 수석을 맡은 5학년 여학생과 자꾸 ‘삑사리’를 내는 4학년 남학생 하나. 지휘자 선생님은 그 사이에 나를 앉히고 남학생과 함께 세컨드 클라리넷 파트를 맡기신다. 퍼스트 파트가 부럽긴 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다. 전문 객원 연주자들이 연습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무렵이라 아이들은 내게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일하게 퍼스트 클라리넷을 맡은 학생만은 전문 연주자 치고는 너무 못 부니 의심을 할 뿐이다.
그렇게 마친 세 번째 연습을 마친 날, 마침 같은 동네 남학생이 첼로 파트에 있어 태워 가려고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차안에서 같이 기다리던 아이의 할머니가 걱정이 되시는 같이 가보잔다. 연습실에 가 보니 첼로 파트 아이들이 6학년 선배가 새로 산 첼로를 둘러싸고 있다. 연습용 첼로와는 확연히 다른 첼로, 제작자 이름과 만듦새를 보니 몇 천 만원은 돼 보인다. 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나와 차에 오른다.
샘이 많은 녀석이다. 쉬는 시간마다 첼로 선생님의 악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녀석, 선생님의 연주 소리를 홀린 듯 듣는 녀석이다. ‘저는 왜 선생님 같은 소리가 안 나요?’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녀석이다. 선생님의 왼손가락 동작 하나하나를, 오른손의 활 쓰는 동작을 모두를 배우려고 애쓰는 녀석이다. 그래서인지 여덟 명의 첼로 연주자 중 소리가 제일 낫다. 그런데 몸집이 작은 탓에 쓰고 있는 첼로는 3/4 사이즈의 그저 흔하디흔한 연습용 첼로다.
“불부나? 그 헹아 깽깽이가 불부나 말이다.”
“아뇨, 그냥 멋있어서 본 거예요.”
“불부모 니도 한나 사라. 에미한테 한나 사 돌라캐라”
“어머니, 곧 풀 사이즈 첼로로 바꿔야 할 텐데 너무 비싼 첼로는 뭐하게요. 그리고 오케스트라 아이들이 너무 험하게 놀아서 첼로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경상도 할머니답게 화끈한 말투다. 그런데 평소에 쾌활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꽤나 풀이 죽어 있다. 아이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아이가 비싼 첼로를 사 달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아이 어머니의 말이 백 번 옳다. 머지않아 성인용 풀사이즈 첼로를 써야 할 테니 그 때까지는 지금의 첼로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쉬는 시간에 망나니처럼 악기 사이를 질주하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내가 다 모골이 다 송연하다.
그런데 할머니의 ‘불부나?’ 한 마디가 귀에 긴 메아리를 남긴다. 할머니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일까? 오케스트라 연습을 시작하기 전 악기 점검 차 갔다가 본 클라리넷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처분하고 조금만 더 보태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격이다. 내 대답은 정해졌다. ‘불부다.’다. 불부면 사는 거다. 설사 돈이 남아돌더라도 무조건 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핑계가 있어야 한다. 오케스트라 연습 핑계로 한 달 술자리를 피해 다니면 감당이 된다. 그래, 한 달 새 친구들이 어디로 가지는 않을 테니 친구들과 클라리넷을 맞바꾸면 된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배짱은 되지 않으니 나 또한 불부다.
그 다음 주 연습 중 쉬는 시간,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아이들이 모인 곳은 부러움을 한 몸에 산 첼로가 있는 자리.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뛰어다니다 세워둔 첼로를 발로 차 버린 것이다. 아이들을 헤치고 다가가 보니 대형 사고다. 줄은 다 풀어져 있고 브릿지는 날아가 있다. 무엇보다도 시커먼 지판에 목에서 분리돼 있다. 설마 넥이 부러진 걸까? 그렇다면 정말 큰 사고다. 다행이 넥은 안 부러졌다. 몸통을 여기저기 두드리며 진단해 봐도 어디 터진 데는 없는 듯하다. 분리된 지판은 다시 붙이면 되는 일, 사색이 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아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사태가 수습이 되었다.
“어머니, 제가 뭐랬어요. 얘들한테는 비싼 첼로는 안 된다 했잖아요.”
“아이다, 비싼 첼로라 그만한 기라. 내 비싸고 존 거만 미기 가 아범도 그 나이에 건강한 기라. 새임, 그 첼로 얼매나 하는교?”
그날의 사고는 단톡방에서 바로 소문이 났는지 하교 길 차에 오르자마자 이야기가 오고 간다. 아이의 엄마는 비싼 새 첼로를 사 주지 않아도 될 핑계를 얻어 화색이 돈다. 그런데 할머니는 막무가내다. 아니 이미 결심이 선 듯하다. 당신의 아들을 어떻게 키우셨을지 눈에 선하다.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것, 맛난 것, 예쁜 것을 아들에게 모두 쏟아 부었을 그 모습이다. 그 정성이 이제 손주한테로 옮아가는 중인 듯하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는 대답을 잘 해야 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그 값을 아는 상황, 할머니도 알게 되신다면 뒤로 쓰러지실지도 모르겠다. 삼천만원이다. 가격을 알아보겠다고 하고 몇 주일을 눙치고, 주문이 밀려 1년 후에야 악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말씀 드려 겨우 진정을 시켰다. 그리고는 다가온 크리스마스 연주회, 생애 처음으로 슈트를 차려 입고 연주를 무사히 마쳤다. 꽃다발을 주고받고,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고 나니 드디어 모든 일정이 끝났다. 늦었지만 저녁을 해야 할 시각, 같은 차로 오가며 정이 든지라 저녁식자를 같이 하게 되었다.
“옜다, 니 해라. 얼마 아이 된다.”
“할머니, 뭐예요?”
“통장 아이가? 내 싹 다 긁어모았다. 니 고모들한테도 좀 뜯었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큰 돈을.......”
“아야. 불부야 이기는 기라. 불부모 사문 되지. 큰 깽깽이라 한나 사 주라.”
얼마를 주셨는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굳이 삼천만원짜리 악기를 살 필요는 없으니. 샘이 많은 아이와 그 샘을 채워주는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불현 듯 후회가 밀려온다. 연주회를 핑계로 새 악기를 하나 사는 건데 그랬다. 아니 새 악기는 아니더라도 A조 클라리넷을 대여할 걸 그랬다. 연주 레퍼토리였던 크리스마스 모음곡의 악보를 받아보니 #이 여섯 개가 붙어 있다. 좀 느린 부분이면 모를까 빠르고 신나게 불러야 하니 제대로 불기는 불가능하다. A조 클라리넷으로 불면 #이 한 개가 된다. 망설이다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그 부분은 립싱크, 아니 핑거싱크로 때웠다. 괜히 불려고 하다가 ‘삑사리’를 내는 것보다 나으니.
어차피 ‘이생글’이니 나에게 과도한 투자를 할 필요는 없다. 악기가 업그레이드 된다고 연주도 그리 될 거란 보장은 전혀 없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지만 부러워도 꾹 참을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 그렇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니다. 아이들은 부러워야 움직인다. 부러워야 욕심을 내고, 욕심이 나야 그것을 해 낸다. 그러니 아이들은 부러워야 이긴다. 통 큰 경상도 할머니가 영어를 하신다면 이리 말씀하실 듯하다.
“보이즈, 비 엔비어스(Boys, be env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