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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련 Aug 17. 2021

못 돌라갈 낭일랑 베붑서

-괴짜 공학자의 거친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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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말들07]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방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은 곧 방언입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온기, 향기, 열기를 짧은 글 속에 담아봤습니다.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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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뜸식만 못하죠? 그래도 싱싱한 걸로만 만들었어니 많이 드세요.”

제주도 제주시의 한 감귤 농가, 후배 교수의 본가에 어쩌다 보니 농활 아닌 농활을 하게 됐다. 제주도에 간 김에 몇 년 전에 만들어드린 식탁을 손보러 갔는데 감귤 일이 한창이어서 하루 눌러앉아서 일을 돕기로 했다. 일을 끝내고 마당에서 먹는 저녁이 꿀맛이다. 


그런데 ‘뭍뜸식’이 뭘까? 제주도 토박이들의 집이니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제주도 말 조사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식구들끼리는 제주도 말로 하는데 이 ‘무텟것’이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또박또박 표준말을 쓴다. 무텟것은 ‘뭍의 것’ 정도의 말로 제주도 사람들이 뭍에서 외지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무텟것이란 말은 알아도 ‘뭍뜸식’은 도통 모르겠다.


“뭍 음식요. 무텟것이 먹는 뭍의 음식요.”

후배 교수가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명색이 방언 전문가라 체면상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다행이다. 단어가 만들어질 때 앞의 말 받침이 복사되는, 제주도 말에서만 나타나는 묘한 현상 중 하나이다. ‘뭍’과 ‘음식’이 합쳐지면서 ‘뭍’의 받침 ‘ㅌ’이 하나 더 복사돼 ‘뭍뜸식’이 된다. 왜 ‘뭍틈식’이 아니고 ‘뭍뜸식’인가는 너무 복잡한 문제이니 일단 넘어가야 한다.


제주도 토박이인 ‘섬것’이 뭍에 나와 살고 있는 후배의 인생 이력도 독특하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무기를 만드는 학과라고 생각하고 무기재료공학과에 입학했단다. 요즘으로 치면 신소재공학과인데 천문학과가 문학을 공부하는 덴 줄 알고 들어갔다는 것만큼이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농담으로 생각하지만 가끔씩 하는 행동을 보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석박사 과정에서는 엉뚱하게도 경제학을 공부해 학위도 경제학 박사로 받았다. 그리고는 잠시 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공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논문은 여전히 경제학 논문을 쓰면서 학생들에게는 수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도대체 전공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그런 사람인데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면 경제공학자쯤 되겠다.


제주도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정확하게 표준말을 쓴다. 우리말의 한 갈래라지만 제주도 말은 다른 지역의 말과 차이가 커서 소통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대학 입학 이후 죽 서울 생활을 했으니 일부러 풍기지 않는 한 제주도 말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경제공학자의 전화를 엿듣기 전까지는 자칭 방언 연구자인 나 또한 이 양반이 제주도 사람인지 까맣게 몰랐다.


“효원이 어린이집 갔다 완? 이 큰나방이 제주 가멍 맛난 거 사줄 테니 엄마 아빠 말 잘 들어. 효민이가 조근너멍 보고 싶어한다고 얘기하고.......”

“누구야? 조카?”

“네, 네 살 먹은 지집빠인데 음청 귀여워요.”

“근데, 제주도가 집이야? 제주 토박이였어?”


이제까지 들어오던 말과는 전혀 딴판인 말을 듣고서야 이 괴짜 공학자의 고향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갔다 완?’의 ‘완’은 평안도 말에서나 나타나는 말끝인데 이 젊은 양반이 간첩일 리는 없다. 다행히도 ‘큰나방’과 ‘조근너멍’, 그리고 ‘지집빠이’에서 정체가 드러난다. 그저 논문으로만 읽었던 ‘큰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계집아이’의 제주도 말이다.


‘아방’은 ‘아버지’이고 ‘어멍’은 어머니의 제주도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큰’과 ‘족은(작은)’과 합쳐질 때 받침 ‘ㄴ’이 복사된다. 그러다 보니 ‘나방’과 ‘너멍’이 생겨난다. ‘지집’은 ‘계집’의 제주도 말이다. 이것이 ‘아이’와 결합하다 보니 역시 받침 ‘ㅂ’이 복사되고 된소리가 되어 ‘빠이’가 된다. 이런 변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절대 나타나지 않으니 이 양반이 제주도 사람이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다. 한참 전에 듣고는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뭍뜸식’도 같은 현상이다.


다음날, 농활이 하루 더 연장되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낚시를 해야 하는데 감귤밭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일을 보니 한가하게 낚시를 가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나만이라도 바닷가로 보내려 하지만 태워다 주고 태워 오는 것도 일이고 낚시도 잘 못하는 이를 갯바위에 혼자 두고는 내내 걱정할 것이 뻔하니 나 또한 남아서 서툰 일손이나마 보태기로 했다.


그런데 이 괴짜 공학자의 얼굴색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좋아하는 낚시를 하지 못해서일까? 놀러 온 선배에게 뜻하지 않은 농활을 시키게 된 것이 미안해서일까? 급기야 부모님께 소리를 버럭 지른다.


“못 돌라갈 낭일랑 싹 베붑서”

화가 단단히 났는지 내가 듣는데도 못 알아들을 제주도 말로 쏟아붓는다. 글은 띄어쓰기를 해야 해서 이렇게 써 놓으면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들은 소리는 그저 [모또라갈낭일랑싹베붑써]이니 한참을 생각해야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 있는 말이다.


‘낭’은 ‘나무’이고 ‘베붑서’는 ‘베어 버리세요.’이니 뒷부분은 알겠다. 그런데 ‘못 돌라갈’은 도통 모르겠다. 헉, ‘못 올라갈’에서도 받침의 복사 현상이 나타나다니. ‘못 쏠라갈’이 아니어서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못’을 끊어 읽어야 하니 받침의 ‘ㅅ’이 ‘ㄷ’이 되고 이 ‘ㄷ’이 복사니 ‘못 똘라갈’이 되는 것이다. ‘뭍음식’이 ‘뭍틈식’이 아닌 ‘뭍뜸식’이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무텟것이 이렇게 말소리에 분석에 빠져 있을 동안 괴짜 공학자의 부모님은 당황하셨는지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계신다.


“감귤나무는 키가 크면 수확 효율이 떨어지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사다리 밟고 올라가서 작업하다 보면 위험하잖아요. 그니까 키가 안 닿는 나무는 다 베 버리고 묘목 다시 심는 게 더 낫잖아요.”

괴짜 공학자는 다시 상냥한 본래의 말투, 그것도 빤질빤질한 서울 말투로 돌아왔다. 앞의 짧고 퉁명스러운 말은 아들의 말이었는데 이 긴 설명은 경제공학자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나무가 늙고 키가 크면 경제성이 떨어지니 경제학자의 말답다. 그런데 경제공학자의 방점은 뒤쪽에 찍혀 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작업하는 것이 영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럴 때는 공학자다.


‘못 돌라갈 나무’, 아니 ‘못 올라갈 나무’는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라는 속담 때문에 꽤나 익숙한 구절이다. 그런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끼어들어 못 올라갈 나무에 대한 판단을 흐린다. 전자는 능력치를 넘는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는 말일 테고, 후자는 불굴의 의지로 목표를 끝까지 달성하도록 격려하는 말일 텐데 그 맥락을 무시하면 헷갈릴 수도 있다.


인생의 고개를 올라가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열 번 찍을 나무’ 얘기를 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러나 인생의 고개를 내려가는 이들에게는 ‘못 올라갈 나무’ 얘기가 어울린다. 패기와 오기로 도전하기보다는 그렇게 벌여 놨던 일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니 그렇다. 올라가다 떨어지면 크게 다칠 나이이니 건강을 생각해서도 그렇다.


그런 마음을 아셨을까? ‘큰나들’의 고함 속에 담긴 충고에 잠시 놀랐던 부모님들의 표정이 점차 환해진다. 빙긋이 웃으며 부모님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는 ‘조근나들’과도 눈을 맞추신다. 이미 그러기로 진작에 얘기가 되었던 듯. 멀리 떠나 살면서도 부모님의 일과 안전을 알고 살뜰히 챙기는 아들과 형님이 믿음직스러운가 보다. 섬의 거친 바람이 배어 있긴 하지만 괴짜 경제공학자의 마음 씀씀이가 푼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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